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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2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20. "범양 리스트 내손에"

대한선주의 인수 후보로 처음 떠오른 기업은 포항제철이었다. 포철은 자체 수송물량이 막대한 데다 재무구조가 건실해 채권을 보전해야 하는 은행들로서는 매력적인 후보였다.

포철이 후보로 거론되자 해운항만청이 반대하고 나섰다. 비(非)해운사를 신규로 해운업에 참여시키는 것은 해운산업 합리화 정책에 배치될 뿐더러 포철 같은 대화물주가 해운사를 소유하게 되면 기존 수송 질서가 흐트러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른 해운회사들이 반발하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이렇게 해서 같은 해운업도 영위하고 재무구조도 건실한 회사를 물색하게 됐다.

인수 후보는 기존 원양선사 중 범양상선.현대상선.한진해운.조양상선 등 네 회사로 압축됐다.

당시 범양은 자체 경영도 힘겨운 상태였다. 현대상선의 경우 경제기획원이 반대했다. 경제력 집중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현대에 넘겨주는 것은 국내 제1의 재벌그룹인 현대의 문어발식 확장을 억제해 온 정부의 정책과 상충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한진과 조양이 남았다. 한진은 육.해.공 운수업에 진출한 운수 전문업체로 재력면에서도 국내 7위의 기업이었다.

반면 조양은 자산규모면에서 국내 30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채권 보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진에 넘기는 것이 유리했다. 한진이 적임이라는 데는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을 비롯해 거의 모든 관계기관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1986년 11월께 대한선주의 부실 실태와 인수 후보들에 관한 자료를 만들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전 대통령 역시 실무자들의 검토 결과에 공감을 표시했다.

나는 외환은행을 통해 한진측에 인수 의사를 타진했다. 그 해 12월께 한진의 조중훈(趙重勳) 회장이 재무장관실로 찾아왔다. 그는 뜻밖에도 대한선주 인수에 난색을 표했다. 이미 해운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데다 해운업의 불황이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판국에 부실 해운사를 인수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한선주의 제3자 인수는 해운산업 전체의 합리화 차원에서 추진되는 것이며 조회장이 맡는 게 좋겠다는 것이 주거래은행을 비롯한 관계기관들의 일치된 의견" 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그렇다면 '백지(白紙)종군' 하는 마음으로 인수를 검토해 보겠다" 며 돌아갔다. 그는 '백의(白衣)종군' 대신 '백지종군' 이란 표현을 썼다.

87년 4월 19일 부실기업 정리의 와중에 당시 국내 최대의 해운회사였던 범양상선의 박건석(朴健碩) 회장이 자살했다. 갈등관계에 있던 전문경영인 사장에게 '인간이 되시오' 라는 유서를 남기고 그는 두산빌딩 10층 집무실에서 투신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나는 이원조(李源祚) 은행감독원장과 골프를 쳤다. 그가 국세청이 범양 세무사찰에 들어갔다고 귀띔을 했다.

"문제가 또 터질 것 같습니다. 대한선주만으로도 시끄러운데 대통령에게 범양 세무사찰 중단을 건의하는 게 어때요?"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둘이서 한 목소리로 얘기하면 세무사찰은 중단될 것 같았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텔레비젼을 켜니 박회장 자살 보도가 나왔다.

"아…, 갈 사람은 가고 마는구나. "

'해운왕' 으로까지 불리던 그도 부채가 1조원이나 쌓여 부도나게 생기자 나를 찾아와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았었다.

박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범양 리스트' 라는 것이 회자됐다. 내 이름도 사람들 입에 올랐고 내가 범양서 받은 돈이 20억원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재무부 국장회의에서 "나도 20억짜리는 된다" 고 조크를 하자 다들 '와' 하고 웃었다. 범양 리스트는 실은 내 수중에 있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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