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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영화제 주무르는 '할리우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베를린 영화제의 본선 경쟁작이 주로 상영되는 베를린날레 팔라스트 극장 앞엔 대형 맥도널드 식당이 있다.

지난 7일 개막해 24편의 경쟁작 대부분이 선보인 올 베를린 영화제(51회)의 단면을 읽어볼 수 있는 상징이다.

올해에도 할리우드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경쟁작 가운데 미국영화는 '트래픽'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위트' (마이크 니컬스)등 예년보다 적은 다섯 편에 그쳤으나 관객의 시선은 비경쟁작으로 상영된 미국영화 두 편에 더 몰렸다.

'양들의 침묵' 속편인 '한니발' (리들리 스콧)과 새디즘이란 단어의 뿌리인 프랑스 사드 백작의 성적 팬터지를 그린 '퀼스' (필립 카우프만)가 그 작품들.

두 작품 모두 두 차례 추가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특히 '한니발' 은 영화제가 끝나는 이번 주말 독일 전역에서 개봉돼 영화제를 홍보창구로 활용하는 듯한 느낌을 줬다.

뿐만 아니다. 각각 영국.이탈리아 영화로 나온 '초콜릿' (라세 할스트롬)과 '말레나'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제작.배급도 미국 대형 영화사 미라맥스가 맡아 실제론 할리우드 영화로 칠 수 있다.

미라맥스측은 영화제 초반에 소개된 두 작품의 홍보를 위해 베를린 도심의 특급호텔에 각국 영화기자들을 대거 불러 감독들과 인터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또 이들 대부분은 올 아카데미상 후보를 노렸던 작품들이라 베를린영화제 자체가 아카데미의 전초전 비슷하게 움직이는 모양새다.

최근 체력이 급속히 떨어진 유럽영화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때문에 세계 영화현장의 역동성을 보여준다는 영화제의 기본취지는 크게 퇴색했다. 할리우드의 득세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일단 베를린 고유의 개성을 살려내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

할스트롬 감독은 "할리우드 자본의 국제화는 어쩔 수 없는 대세" 라며 "대신 각국에서 그들 나름의 독특한 향기가 담긴 작품을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전양준씨는 "칸.베니스영화제에 비해 베를린은 예전부터 할리우드의 색깔이 강했으나 올해엔 더 심한 것 같다" 며 "지난 20년 동안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모리츠 데 하델른이 올해 물러나 내년엔 무언가 달라지지 않겠느냐" 고 진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관객을 사로잡은 화제작은 드물 수밖에 없다. 한국.중국 등 아시아 영화가 다섯 편이나 선보여 최근 세계 영화계에서 급부상한 아시아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순도 1백%의 사랑을 그리겠다는 일본영화 '클로에' (고리 주)는 엉성한 얘기와 산만한 구성으로 실망을 주는 등 작품간 편차가 심해 아직 갈길이 먼 것으로 지적됐다.

영화제에 들른 '아름다운 시절' 의 이광모 감독은 "미국.유럽영화는 기존 영화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적 시도가 부족하고 아시아 영화는 TV 드라마 같은 느낌을 많이 준다" 고 말했다.

교적 양호한 평가를 받은 작품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마약분쟁을 다룬 '트래픽' , 이탈리아의 시실리를 무대로 전쟁의 광기를 고발한 '말레나' , 파나마운하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기극을 '007 시리즈' 형식에 담은 '파나마의 재단사' (존 부어먼) 등이다.

암에 걸린 한 여성 영문학자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위트' (마이크 니콜스)는 대사가 난해해 고급 관객을 위한 영화제용 작품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포르노 논쟁을 부를 정도로 과감한 표현으로 눈길을 끌었던 '로망스' 를 연출한 프랑스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야의 '나의 누이에게' 는 날씬하고 뚱뚱한 자매를 대비시키며 한창 성장하는 소녀의 성적 욕망을 분석한다는 소재가 참신했으나 '로망스' 에 비해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영화 제작.배급의 혁명적 변화를 몰고올 디지털 영화의 가능성을 확인한 게 이번 영화제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1995년 덴마크 감독 라스 폰 트리에 등이 인위적 조명과 음향, 현란한 특수효과를 배제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도그마 정신을 그대로 실천한 덴마크 감독 론 셔피그의 디지털 영화 '초보자를 위한 이탈리아어' 가 1백만달러(약 12억원)란 적은 제작비에도 호평을 받으며 이내 미국 배급사 미라맥스에 팔렸다.

미국 감독 스파이크 리도 '뱀부즐드' 란 고선명(HD) 디지털 영화로 최근 몇년 사이의 부진을 만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를린〓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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