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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손지창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최근 한 모임에서 들은 우스갯소리.

문1: 여자가 판단력을 잃었을 때는? 답 : 결혼한다.

문2: 여자가 인내력을 잃었을 때는? 답 : 이혼한다.

문3: 여자가 기억력을 잃었을 때는? 답 : 재혼한다.

우스갯소리처럼 판단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 홀로 키우는 여성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들이 속내를 털어놓기 위해 지난해 개설한 '미혼모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사이트만도 30명 안팎이 몰려 있다.

인기 탤런트 겸 벤처 사업가로 제 길을 착실하게 걸어가는 손지창씨가 설날을 맞아 가수인 이복형과 함께 유명 아나운서였던 아버지 임택근씨에게 세배를 드림으로써 그간 미혼모의 아들이었음을 밝혀 30년 묵은 '출생의 베일' 을 벗어던진 일이 있었다.

장안의 화제가 된 이 기사에서 유독 나의 시선을 끈 것은 그의 성(姓)에 관한 부분이었다.

친아버지의 성도, 어머니의 성을 따르지도 않고, '제3의 성' 을 달고 있는 사실이 궁금했다.

사연인즉, 현재 그의 성은 4~5세 때 함께 살던 이모부의 성을 어머니가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와 이모부라는 인척관계가 빚을 아이러니는 생각조차 못하고 철석같이 이모부의 아들로 믿고 생활해오던 그는 어느날 싸움 끝에 사촌누나가 "왜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느냐, 너는 아버지 아들이 아니다" 고 말해 처음으로 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았단다.

30년간 홀몸으로 세파를 견디며 당당히 아들을 키워냈으니 그의 어머니는 보통 여성보다는 몇곱절 강한 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왜 굳이 자신과 다른 성을 아들에게 달아주고 싶어했을까. 이런 나의 의문에 가정법률상담소에서 오래 상담활동을 해 온 한 가족법 전문가는 "아비 없는 자식이란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라고 잘라 말했다.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했을 경우 미혼모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 아이에게 주위의 냉대가 쏟아질 것을 두려워 해 형부나 오빠의 호적에 가족의 동의를 얻어 입적하는 이들이 많다고 그는 덧붙였다.

한 조사에 따르면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미혼여성 중 자신이나 미혼부가 아이를 소중히 여겨 낳기로 결정해 출산하는 이는 13%밖에 안된다고 한다.

정작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어도 사회의 눈이 무서워 인공 임신중절을 하는 경우가 24%나 된다고 하니 미혼모에 대한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이 죄 없는 생명을 죽음에 빠뜨릴 뿐 아니라 생명 경시의 사회풍조로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손씨는 "초등학교 시절 가정환경조사서를 쓰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고 고백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거짓말로 만들어 내야 했기 때문이다.

코흘리개 시절 친구들과 싸움이 벌어져도 차라리 얻어맞는 쪽을 택하고,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무시를 당하거나 놀림을 받을 것이 두려웠던 탓이다.

독일에서는 자녀를 홀로 양육하는 미혼모가 아동복지기관에 도움을 청하면 기관이 자녀의 보좌인으로 나서 인지청구와 부양청구를 대리해 아버지를 찾아 출산 전후 부양료 등은 물론 취업할 수 없는 기간 동안 부양할 책임까지 지울 정도이니 '아버지 없는 설움' 을 이중으로 겪는 우리 사회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비단 미혼모의 자녀뿐일까. 이혼으로, 배우자의 사망으로 편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유엔아동기금(UNICEF)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6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15세 이하 어린이 사고.상해 사망률을 조사한 결과 한국이 10만명당 25.6명으로 멕시코보다도 높아 1위의 불명예를 안았다고 해서 사회가 떠들썩하다.

그러나 나는 세계 1위의 어린이 사고.상해 사망률보다도 편부모 슬하에서 자라나는 어린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별의식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사고는 제도의 보완으로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비뚤어진 의식으로 입은 마음의 상처는 어떤 것으로도 치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출생의 비밀공개' 가 가져올 사회의 시선을 극복하는 데 손씨는 30년이 필요했다.

우리 사회가 편견 없이 이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 것일까.

홍은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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