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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한심한 한국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있던 고대 아시리아에선 병이 나면 길가는 사람들에게 약방문을 구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내 눈에는 내 병이 잘 보이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의 지혜를 빌리겠다는 발상인데 두통을 치료하려면 귀를 자르라는 처방도 있었다니 남의 충고가 항상 유용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요즘 방송에 나오는 한 공익광고에는 남의 눈을 빌려 우리 잘못을 꾸짖어 보자는 발상이 보인다.

무뢰한이 새치기.무단횡단을 하거나 거리에 꽁초를 버리면 외국인 등이 눈총을 주는 내용인데 '한심한 한국인' 과 '훌륭한 외국인' 을 대비하는 듯 해 왠지 찜찜하다.

지나친 자기 비하는 아닌지. 직접 목격한 '선진 외국' 의 모습들을 보자. 독일 베를린의 중심가인 쿠담 거리에선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선 신호등에 '걷지 마시오' 신호가 들어와도 지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런던과 파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배경을 알아보니 수긍이 갔다. 베를린의 경찰관에게 무단횡단을 지적했더니 "자신의 책임 아래 하는 행동을 공권력이 간섭할 순 없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공공질서와 공동체 의식 형성은 물론 중요하지만 자율적으로 이뤄져야지 권력이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계몽하려 들어선 안된다는 소리로 들린다.

맨해튼의 한 현지 주민은 "이곳 사람들은 바쁜 데다 타산적이어서 달려오는 자동차가 없으면 아무도 건널목에서 신호를 지키지 않는다" 고 말했다.

고지식하게 건널목에 서 있는 사람은 관광객 아니면 시골뜨기라 소매치기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지구촌에선 누구도 자신의 풍속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유럽연합(EU)은 몇년 전 '이상적인 유럽인' 이란 제목의 한쪽짜리 농담 벽보를 배부했다.

"프랑스인처럼 운전하고 이탈리아인처럼 차분하고 그리스인처럼 군말없고 오스트리아인처럼 인정많고 독일인처럼 유머감각이 넘치고" 등등의 내용인데 이들 국민에 대한 실제 평은 나열한 것과는 정반대다.

회원국 국민의 특성을 역설적으로 꼬집은 것이다. 자신과 남의 단점을 하나의 개성으로 인정하는 긍정적인 자세다.

이집트에서 경험한 바로는 외국인은 택시를 탈 때든, 유적지에 입장할 때든 무조건 현지인보다 돈을 더 내야 했다.

우리 입장에선 바가지다. 버스를 타는 순서는 그야말로 '노련하고 약삭빠른 순' 이었다.

하지만 모두 이유가 있었다. 아랍 사회에는 '박쉬쉬' (팁)라고 해서 부자는 빈자가 요구하면 당연히 도와주는 풍속이 있다.

값을 치를 때도 가난한 사람은 깎아달라고 요구하고 부자는 후한 팁을 붙여 내는 것을 당연시한다.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다. 잘 사는 외국인에게 돈을 더 받는 것은 이 풍속의 연장일 뿐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아무리 만원버스라도 여자가 차지한 좌석 옆에는 절대 남자가 앉지 않고 좌석을 차지한 어른은 어린이를 무릎위에 받아준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풍속이 다른 외국인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질서는 공동체 유지를 위한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리고 정부가 국민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주민들이 알맞은 방식으로 스스로 형성하는 하나의 풍속이다.

채인택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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