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양육권 판결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부부는 8년 전 결혼해 딸 영서(가명·7)를 낳았다. 처음에는 여느 부부처럼 주말에 가족 여행도 다니며 단란하게 지냈다. 그러나 재산 문제로 양가 다툼이 생기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 불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1년 전부터 별거를 시작했다. 남편은 별거 기간에도 수차례 영서를 만나려고 했다. 부인과 장모는 ‘영서가 싫어한다’는 이유를 들어 만나게 해 주지 않았다. 결국 남편은 부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하면서 아이 양육권을 자신에게 달라고 법원에 청구했다.

담당 판사는 부부의 이혼과 아이 양육 문제를 별개로 검토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우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아빠가 영서를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게 허락했다. 그러나 첫 번째 만남에서 영서는 울었다. 아빠와 만나기를 거부했다. 또다시 부부 사이에 심한 다툼이 벌어졌다. 판사는 부부와 딸이 정기적으로 전문가의 상담을 받으라고 했다. 서로 만나는 훈련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상담 초기에 영서는 늘 입버릇처럼 아빠에게 “저리 가”라고 말했다. 반면 엄마에게는 가까이 다가가 “엄마가 좋아”라는 말을 거듭했다. 상담 과정에서 영서가 그린 그림에는 아빠가 없었다. 영서는 항상 엄마만 그리겠다고 했다. 엄마의 오른쪽에 천사를 그리고서는 자신이 엄마를 도와주는 천사라며 즐거워했다.

이런 영서에게도 전문가에 의한 상담이 거듭되면서 차츰 변화가 찾아왔다. 아빠와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영서가 아빠와 함께 웃고 놀이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담당 판사는 아빠와 딸이 1박2일 동안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다음 날 엄마가 법원을 찾아와 항의했다. 영서가 아빠와 만나고 오자마자 ‘배고프다’면서 밥을 마구 먹는 것으로 볼 때 밥을 굶긴 것 같다는 것이었다. 또 잠도 집이 아닌 모텔로 데리고 가 자게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의 말은 달랐다. 영서는 고모 집에서 조카들과 잘 지내고 왔다고 했다. 고모 집으로 데리고 가는 도중에 영서가 모텔에 가자고 해서 오히려 자신이 당황했다고 했다. 부부는 예전에 주말 가족여행을 갈 때 모텔에서 자곤 했다. 영서는 그때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아빠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온 영서가 엄마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엄마는 전문가로부터 어린 딸이 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을 듣고 난 후 울음을 터뜨렸다.

상담 과정에서 남편은 이대로 재판이 끝나면 영원히 영서를 못 볼 것 같다고 걱정했다. 양육권 주장을 접을 테니 가끔씩 만날 수 있게만이라도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부인은 마음을 조금 더 열고 영서를 위해 적극적으로 상담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수차례에 걸친 전문가 상담, 서로 간의 만남에 관한 훈련 과정을 거쳐 조정 합의가 이루어졌다. 부부는 이혼하되 친권자와 양육자는 엄마로 정했다. 대신 아빠는 영서의 양육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나아가 아빠는 영서와 정기적인 만남의 기회를 가지면서 영서의 영원한 수호자가 되기로 했다.

영서와 같은 아이들에게 법의 잣대만을 들이댄다면 판사가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는 인생 고통의 심연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앞으로 그들이 짊어지고 감당해야 할 행복과 불행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의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는 데 도움이 될 전문가의 조력이나, 복지적 배려를 주선해 내는 코디네이터로서 기능해야 할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의 가정법원은 그렇게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담당 판사나 전문가들의 열정과 식견이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수많은 이혼 사건의 하나로 간단하게 처리됐을 수 있다. 그랬다면 부모의 갈등으로 인해 영서의 어린 가슴에 박힌 아픔은 쉽사리 치유되지 않았을 것이다. 딸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빠의 불안은 사건이 종결된 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될지도 모른다.

영서와 같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체계를 갖출 때가 됐다. 국가가 소중히 지켜주어야 할 가족·아동 복지 문제의 해소 방안이 재판 현장에서도 진지하게 모색되고 구현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서울에만 있던 전문법원인 가정법원이 전국으로 확대, 설치되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올해 새로 설치될 가정법원들이 가정 문제를 보다 더 전문성 있게 다루면서 생활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회 안전망으로 기능하길 소망한다.

김상준 사법연수원 수석교수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