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규제완화가 부른 '전력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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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28일 오후(현지 시간) 미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주민들에게 "친지나 친구들이 가능한 한 한자리에 모여 TV를 시청해 줄것" 을 주문했다.

미국인들이 가장 열광하는 슈퍼보울(풋볼리그 NFL 챔피언 결정전) 개막을 몇시간 앞두고 나온 웃지 못할 촌극이었다. '풍요의 땅' 캘리포니아의 전력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한마디로 어설픈 규제완화 탓이다. 주정부가 전력가격(도매)규제를 풀면서 소매가격규제는 계속하는 등 어정쩡한 입장을 취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전기소비자들, 다시 말해 주민들과 기업 몫이 되고 있다.

◇ 1996년의 전력분야 규제완화가 시발〓캘리포니아주는 이해 전력업체들에 대해 탈규제조치(deregulation)를 단행했다. 당시 전기회사들은 정해진 지역에 주정부가 정해주는 가격으로 전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민간기업이었지만 주정부의 보호 아래 독과점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주 전기요금은 미국에서 가장 높았다.

당시 주지사였던 피터 윌슨은 10년 전 영국의 사례를 참고, 전력시장 자율화했다. 가격규제를 없애면 다른 주의 전기업체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어 전력공급이 늘고 자연히 전기요금도 내려갈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자율화를 단행한 지 5년이 지난 지금 캘리포니아주에서는 강제단전이 가능한 '긴급절전 3단계' 조치가 15일째 발효되고 있다.

◇ 철저하지 못했던 규제완화가 화근〓당시 주정부는 전력도매가격만 풀었다. 일반 가정과 기업에 공급되는 소매가격은 2002년까지 동결키로 결정했다.

자율화로 인해 일반 전기요금까지 올라갈 경우 소비자들의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전기회사들이 발전업체들과 장기간 전력공급계약을 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장기계약으로 가격이 고정되면 전기값이 떨어져도 그 혜택이 소비자들에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개혁 초기만 해도 낮은 전기가격 때문에 이같은 가격통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이 즈음 캘리포니아주의 양대 전력회사인 남가주에디슨사(SCE)와 태평양가스전기사(PG&E)는 자신들의 발전시설을 노스캐롤라이나 및 텍사스주의 발전회사에 팔아넘기고 중간공급자로 변신했다.

이들 발전회사에서 싼 값에 전기를 사다 적당한 이문을 붙여 주민들에게 파는 일이었다. 이같은 시스템은 4년 남짓 아무런 탈이 없었다. 문제는 지난해 봄부터 불거졌다.

천연가스 및 유가 폭등에 따라 전기도매가격도 마구 뛰었던 것이다. 에디슨사와 PG&E가 다른 주의 발전회사에서 사오는 도매가격이 지난해 2월만 해도 ㎾당 5센트였으나 연말에는 40센트로 폭등했다.

그러나 두 회사는 소매가격 규제에 묶여 전기요금을 올릴 수 없었다. 도매가격 인상에 따른 손실을 몽땅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두 회사의 부채는 1백20억달러로 불어났고 급기야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공급한 전력의 요금도 받지 못하게 된 발전회사들은 추가 전력공급을 거부했고 그 직후 캘리포니아는 '어둠' 에 싸이게 됐다.

◇ 당국의 안일한 판단이 빚은 재앙〓경제가 커지면 전력수요도 당연히 늘게 마련. 그런데도 주정부는 자율화 조치 이후 몇년간 전기가격이 안정세를 유지하자 마땅히 했어야 할 준비를 소홀히 했다.

전력수요가 늘고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공급능력 확충에 신경쓰지 않았던 것. 지난 5년간 이 지역의 발전소 신설은 전무했다. 그 결과 전기가격(도매)이 폭등했다.

발전소 신설을 막은 것 또한 규제였다. 우선 발전소 세우는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웠으며, 송전시설에도 무거운 세금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다 주민들의 님비(NIMBY)현상도 발전소 건설을 가로막는 데 일조했다.

◇ 주정부 대책은〓당분간 주정부가 전기공급자로서의 역할을 확대한다는 입장이다. 주정부가 다른 주의 발전회사들과 최장 10년간 장기 전력구매계약을 해 각 가정과 기업에 전기를 공급한다는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사실상의 부도로 기능을 상실한 에디슨사와 PG&E사의 회생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주정부는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자금을 두 회사에 투입할 계획이다. 아울러 수요를 줄이기 위해 전기요금 규제도 단계적으로 푸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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