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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공무원의 영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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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용장려 세액공제가 효과가 없다고) 재정부가 연말엔 제일 세게 반대했거든요. 몇 주 만에 입장이 급선회한 내막이 뭡니까?”(이혜훈 한나라당 의원)

“그래서 공무원은 ‘혼’이 없다고 그러지 않습니까.”(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지난주 과천 관가에선 이 말이 화제였다. 윤 장관의 평소 소신과는 좀 다른 발언이었다. 지난해 10월 중앙부처 실국장 워크숍에선 “30여 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가장 모욕적인 질문은 ‘공무원이 혼이 있느냐’는 것”이라며 “그런 얘기를 들으면 울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장관에 취임한 뒤 “재정부 공무원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보루인 만큼 ‘영혼’을 가져도 좋다”고도 했다.

장관이 말을 바꿨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으나, 이번 건(件)만은 그렇게 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윤 장관의 답변이 나오자 질의한 의원도, 답한 장관도, 지켜보던 공무원들도 모두 파안대소했다. 농담 같기도 하고 반어법을 구사한 것도 같다. 공무원은 정말 영혼이 없을까. 정용덕 서울대 교수(행정학)에 따르면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말한 관료제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고 한다. 관료제는 정치적 주인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정교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해석(영혼이 없다)과 함께, 관료 나름대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영혼이 있다)라는 풀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료집단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휘둘리다가 장관을 그만 둔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다만 한국은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선출직 정치인에 의해 관료가 매우 효과적으로 통제를 받는다는 점에서 ‘영혼이 없다’ 쪽에 가깝다고 한다. 그래도 “관료가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하는 공무원들의 심드렁한 반응은 좀 의외였다. 장관이 정권 창출 과정에 기여하지 않아 ‘지분’이 없다는 말도 나온다. 그래서 청와대와 정치권에 ‘말빨’이 잘 안 먹힌다는 거다. 일부 간부는 청와대의 ‘너무 꼼꼼하고 자상한’ 교통정리에 무력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장관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사람이다. 발밑이 꺼질까 무서워서 조심조심 가다 보면 아무 한 일 없이 세월이 흘러간다. 뭔가 하려고 너무 서두르다 보면 발밑이 꺼져 얼음물에 빠져 죽는 수가 있다. 적당한 속도로 요령 있게 얼음판을 건너 목적지로 가야 한다. 그것도 혼자서 몰래 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기자와 공무원과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묘기를 펼쳐야 한다.”

어느 소심한 전직 장관 얘기가 아니다. 참여정부 시절 실세장관 소리를 듣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한 말이다. ‘개국공신’ 답게 비공개로 “청와대 관저를 적지 않게 드나들었다”고 책에서 밝힐 정도로 그는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영리의료법인을 둘러싼 타(他)부처와의 갈등이나 고용 관련 법안의 처리가 국회에서 지연되는 탓에 자괴감이 들 법한 윤 장관에게 그의 말이 위안이 됐으면 한다. ‘지분’ 많던 유 장관에게도 ‘묘기 대행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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