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트라다 죄값 꼭 물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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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필리핀의 민중시위를 촉발시킨 것은 지난 16일의 상원 탄핵재판이었다.

에스트라다의 비밀계좌 조사가 표결 끝에 11대 10, 간발의 차로 무산되자 야권 상원의원들은 집단 사표를 내고 거리로 나섰다. 그 이후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이 과정을 주도한 세르기오 오스메냐 상원의원(사진)을 만나 긴박했던 순간들과 새 정부 출범 후 필리핀의 앞날에 대해 물었다. 오스메냐 의원은 야당인 자유당 소속이다.

- 이번 제2의 '피플파워' 운동에서 상원이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

"비밀계좌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면 에스트라다는 탄핵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트라다를 옹호하는 의원들은 '증거가 없다' 며 조사를 거부했다. 물론 나는 증거를 갖고 있었다.

잔고가 30억페소(약7백50억원)가 넘는 비밀계좌의 사본을 이미 입수한 상태였다. 그러나 우린 표결에서 졌고 끝내 법정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이긴 쪽은 춤을 췄고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반대로 바뀌었다.

"

- 많은 해외언론은 이번 '피플 파워' 가 한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무혈혁명이었다는 사실에 찬사를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행운이었다. 시위는 아무도 조직하지 않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물론 1986년의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 처음엔 적은 인원이 에드사 사원에 모였지만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이 모든 과정이 헌정 중단없이 평화적으로 끝났다는 것은 더욱 큰 행운이다."

- 신임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가 있다면.

"물론 경제재건이다. 이미 취임사에서 최우선 과제로 가난을 몰아내겠다고 밝혔고 각료 가운데 가장 먼저 재무장관을 임명했다. 경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에스트라다에 대한 단죄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처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법치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미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한 한국에 좋은 선례가 있다. "

- 아로요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예상한다면.

"그의 경력으로 보면 급속한 세계화 정책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무역기구(WTO)의 규범을 지키면서 무역장벽을 낮추고 보다 많은 해외투자를 유치할 것이다. 개인적 의견으로는 필리핀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용 인하 문제라고 생각한다. 높은 금융비용, 인건비에 부패로 인한 비용까지 겹쳐 필리핀의 생산원가는 인도네시아나 베트남.중국에 비해 훨씬 높다. "

- 이번 시위과정에서 필리핀 국민이 계층에 따라 둘로 나눠졌다는 지적이 있다.

"그건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당장의 끼니 걱정때문에 권력자의 도덕성 문제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번 '피플 파워' 를 주도한 계층은 중류층 이상이다. 물론 좌파 학생.노동자들도 가담하긴 했지만 깊어진 계층간의 골을 메우는 것도 아로요 대통령에게 주어진 과제의 하나다. "

- 아로요 대통령이 비교적 정치경력이 짧고 정치적 능력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시각이 있는데.

"물론 그의 정치기반이 약한 건 사실이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것도 아니다. 여론조사에서 아로요가 에스트라다보다 뛰어나다고 응답한 사람은 20%밖에 안된다. 그런 이유로 대통령이 되기까지 코라손 아키노등 전직 대통령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는 합법적인 대통령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아키노에게 의존할 필요는 없다.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를 것이다. 아로요가 필리핀을 위해 이 난관들을 잘 극복해 나가길 빈다. "

마닐라〓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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