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즈델·전쟁고아 50년만의 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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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새벽에 자고 있던 아이들을 깨워 트럭에 태웠죠. 죽냄비로 쓰던 일본인의 목욕용 무쇠솥과 아껴 먹던 미군용 식량을 모두 싣고 인천으로 갔어요. "

1950년 12월 미 군목 러셀 브레이즈델(91)이 전쟁고아 1천명을 서울에서 제주도로 피난시킬 때 같이 갔던 배학복(裵學福.87.서울 개포동)할머니의 회고다.

36세 노처녀로 고아들의 임시 거처였던 수송동 종로국민학교(현 삼양식품 종로하치장)에서 보육일을 돕다 브레이즈델과 피난길을 동행했던 그다.

브레이즈델이 26일 한국에 온다는 소식(본지 1월 15일자 26, 27면)에 裵씨와 당시 고아 20여명이 모인다.

다음날인 27일 경기도 양주 한국보육원 근처 음식점에서 황온순(黃溫順.여.101)원장과 함께 환영자리를 마련하기로 한 것.

한국보육원은 고아들이 제주도로 공수(空輸)된 뒤 黃씨를 원장으로 해 문을 열었고, 56년에 서울 이문동으로, 70년엔 지금의 양주로 이사했다.

당시 16세였던 이강훈(李康勳.67.서울 미아동)씨는 19일 "지금은 50대 초반에서 60대 후반이 된 그때의 고아들이 추억을 함께 떠올리는 자리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李씨는 6.25 직후 잠시 국군이 북진(北進)할 때 황해도 해주에서 두 동생(당시 11세, 8세)과 셋이 서울로 피난을 내려왔다가 한꺼번에 고아신세가 됐다.

젖먹이부터 10대였던 이들은 삼삼오오 연락을 주고받으며 당시의 기억을 화제로 삼아 만남을 가져왔다.

이번 브레이즈델의 방한을 계기로 서울.경기지역에 살면서 연락이 끊기지 않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이다.

裵씨 등은 51년 전의 피난길을 '지옥 탈출' 이란 말로 표현했다. 10여대에 나눠 탄 인천으로의 첫 이동은 거의 종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 장만을 못해 다들 꼬박 굶다시피 했다.

"인천에 도착한 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죽은 갓난아기 시체를 여럿 바다에 던졌다" 고 裵씨는 당시의 처참함을 전했다.

대부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부역죄 등으로 수감됐던 여죄수들로부터 데려와 보살피던 아기들(70여명)이었다.

종로→인천→김포→제주로 이어진 닷새간의 피난길엔 고아들과 함께 간호사.교사 등 보육사 3백여명도 동행해 1천3백여명 대식구의 이동이었다고 한다.

李씨는 "서울에서 통조림.초콜릿이 든 '레이션' 박스와 옷.석탄 등을 가져오던 목사님(브레이즈델)이 제주도로 간 뒤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아 근황이 궁금했었다" 고 말했다.

양윤학(梁潤鶴.68.경기도 이천시 부발읍)씨는 "유달리 아이들을 많이 예뻐해 주셨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면서 "목사님이 보고 싶다" 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들은 브레이즈델에게 줄 예정으로 직접 그린 그림과 탈.노리개 등 한국을 기억할 수 있는 선물도 준비하고 있다.

박현영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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