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아빠, 담배 피우면 폐가 까매진대요” 금연 전도사 된 아이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애 덕분에 담배 끊었어요”

새보람유치원에 다니는 승민(7)이가 큰 모형 담배를 입에 물자 예진(7·가운데)이가 “담배는 나빠” 하며 소리친다.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서현(7)이는 아예 입과 코를 막았다. [최정동 기자]

17일 오전 10시30분 새보람유치원(서울 은평구 불광동). 서현이와 친구들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모두 5~7살의 유아들이다. 안병은 유치원 교사가 커다란 담배 모형을 꺼내들자 해맑던 얼굴이 이내 찌그러진다. 코를 막고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돌리는 아이도 있다.

“사람 몸 속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안 교사)

아이들이 일제히 입을 연다. “폐·심장·간·기도….”

“담배를 피우면 어떻게 되죠.”(안 교사)

“독한 냄새가 나요.” “폐가 까맣게 변해요.” “니코틴 때문에 폐암에 걸려요.” 지난 한 해 흡연 예방교육을 받은 어린이에게 담배는 이미 ‘공공의 적’이었다. 뜻도 모르는 담배 성분과 신체의 장기 이름이 술술 나온다.

교사가 태아가 훤히 보이는 임신부 인형을 보여주며 물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피우는 담배 연기를 맡으면 어떻게 되죠.”

“아기가 잘 안 자라요.” “나오지 못하고 죽을 수 있어요.” 유아를 대상으로 한 흡연 예방교육의 효과가 나타나는 현장이다. 담배의 위해성은 머릿속 깊숙이 각인됐다.

“커서 절대 담배 안 피울 거예요”(추승민·7·남). 아이들의 ‘금연 바이러스’는 가족에게도 전파된다. 윤준식씨도 흡연자인 아빠를 걱정하는 딸 서현이에게 감동을 받아 금연의 의지를 굳혔다.

윤씨는 “서현이가 폐가 까매진다며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며 “그런데 담배 대신 아빠 먹으라고 유치원에서 초콜릿·떡·유자차 등 간식을 직접 만들어 오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서현이는 “아빠 몸에서 담배 냄새가 안 나고 집에 꽁초도 안 보인다”며 신이 났다.

“어른 되면 담배 안 피울 것” 100%

지난해부터 만4~6세 유아를 대상으로 한 흡연 예방교육이 시작됐다. 전국 358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각각 짧게는 6개월에서 1년 과정으로 진행된다.

대한암협회와 이화어린이연구원이 공동으로 2년간 33개 주제를 엮은 ‘유아 흡연 예방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보급한 결과다. 교육 프로그램은 금연 노래, 포스터 그리기, 담배 실험 등 유아 눈높이에 맞춘 내용으로 짜였다. 유아를 대상으로 한 것은 사실상 첫 시도.

대한암협회 이광영(한국금연운동협의회 부회장) 부회장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유아 흡연 예방교육이 진행된 것은 해외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교육의 효과는 첫 해부터 나타났다. 교육을 받은 125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어른이 되면 담배를 피워보고 싶다’와 ‘건강에 해로울까 걱정된다’는 응답률이 교육 전 각각 1.3%, 3.8%에서 교육 후 0%, 29.3%로 큰 차이를 보인 것.

‘어른이 되면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답한 어린이도 95.2%에서 100%로 늘었다.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이기숙 교수는 “지식과 행동이 분리되는 성인과 달리 아이는 이 둘이 하나로 통합된다”며 “어려서 각인된 금연 지식이나 개념은 성인이 된 뒤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유아 흡연 예방교육은 가족에게도 긍정적인 ‘나비 효과’를 나타낸다. 학부모 135명을 대상으로 ‘자녀의 금연 권유가 도움이 됐느냐’고 물었더니 80.1%가 ‘그렇다’고 답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금연 선생님’ 역할

흡연 예방교육을 받은 아이는 움직이는 ‘금연 전도사’다. 때론 간접흡연을 유발하는 어른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금연 선생님’을 자처하기도 한다.

교육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한 연세대 보건대학원 이자경 교수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저씨를 보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서슴없이 다가가 ‘몸에 해로우니까 담배 끄세요’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그동안 무방비 상태로 간접흡연에 노출됐던 아이들이 스스로 보호하는 용기를 얻게 된 것. 이기숙 교수는 “일부 유치원 아이는 교육 프로그램에 포함되지 않는 길거리 금연 캠페인을 제안했다”며 “노래를 부르고 안내문을 나눠주며 금연 서약서를 받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자경 교수는 “흡연 예방교육을 유아기부터 시작하면 주변 흡연자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며 “지속적으로 사업을 진행하면 국내 흡연율을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대함암협회는 지난해 유아 흡연 예방교육을 진행한 전국 358개 기관 중 6개 기관을 우수기관으로 선정했다.

쌍문삼성 어린이집(서울 도봉구 쌍문3동), 선릉삼성 어린이집(서울 강남구 삼성2동), 새싹 유치원(서울 성북구 정릉1동), 아이코리아 부속 새세대 유치원(서울 송파구 장지동), 구립녹번복지관 어린이집(서울 은평구 녹번동), 새보람유치원(서울 은평구 불광 1동) 등이다. 이들 우수기관은 이달 27일 이화여자대학교 국제교육관 LG컨벤션홀에서 ‘유아 흡연 예방교육 우수기관’ 현판을 수여받는다.

글=황운하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