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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 친박 아니란 말 상상 못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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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호 06면

박근혜(오른쪽) 한나라당 전 대표와 김무성(왼쪽) 의원이 갈등하고 있다. 친박인 김무성 의원이 헌법재판소 등 독립기관들을 세종시로 보내자는 절충안을 제시하면서다. 김 의원은 20일 “기자회견을 하면 다소간 관계가 어려워질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친박이다’ ‘아니다’라는 얘기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김형수 기자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 김무성(4선) 의원이 갈라설 위기에 섰다. 김 의원이 18일 세종시 절충안을 제시한 기자회견 후 갈등이 가팔라지고 있다. 김 의원은 헌법재판소 등 독립기관들을 세종시로 보내자는 안을 제시하며 박근혜 전 대표를 향해 “관성에 젖어 바로 거부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박 전 대표는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을 통해 “한마디로 가치 없는 이야기”라며 “친박에는 좌장이 없다”고 했다. 다음 날에는 비서실장 역할을 하고 있는 유정복 의원이 나서 “정치 철학이 다르면 친박이 아니지 않느냐”고까지 했다. 그러자 김 의원은 “그동안의 관계를 생각할 때 한마디라도 하고 쫓아내야 하는 것 아니냐. 영원한 적군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선배들의 말도 있더라”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김 의원은 “박 전 대표를 잘되게 하려는 생각이니까 내 발로 친박계를 나갈 생각이 없다”고도 했다. 김 의원은 자타가 인정하는 친박계 좌장이었다. 대선 후보 경선과 총선의 역경도 함께 헤쳐왔다. 그런 두 사람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됐을까.

박근혜·김무성, 애증의 6년

‘친박 아니다’라는 건 박 전 대표의 뜻일 것
김무성 의원은 20일 경남 남해에 가 있었다. 지인들과 모임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과 박 전 대표의 의중을 담은 발언을 두고 언론들이 ‘박 전 대표와 사실상 결별’이라고 보도한 것에 대해 씁쓸해했다. 또 ‘친박에 좌장이 없다’ ‘정치 철학이 다르면 친박이 아니다’란 박 전 대표 측근들의 말에는 상처가 큰 듯했다. 그와 전화로 현재 심정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기자회견이 분란을 만들 것이라곤 예상을 못했나.
“여러 번 말했지만 기자회견은 진짜 충정에서 한 것이다. 세종시를 둘러싼 상황이 너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 많은 고민을 했다. 국민들이 짜증스러워 하고 있다. 자기 주장만 있고 상대방의 입장은 없다. 양보는 안 하려고 한다. 정치는 협상과 절충이다. 서로 명예롭게 물러서지 않고 있다. 내가 내놓은 안은 나름대로 묘수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수가 나올 수가 없다. 당내 문제라 의총에서 할 수도 있었지만 세종시 신안에 반대하는 야당도 있고 충청도민도 있어서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 기자회견을 한 후 이 안을 가지고 의총에서 얘기할 수 있다고 봤다.”

-누구보다 박 전 대표를 잘 알지 않느냐. 이런 방법이면 박 전 대표와의 관계가 더 꼬인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세종시 문제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정책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소신은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나는 정부 부처가 세종시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뜻을 오래 전에 밝혔다(김 의원은 지난해 10월 한 케이블TV에 출연해 세종시 신안을 지지한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세종시 문제가 격한 싸움으로 가버렸다. 그런 상황이면 누군가 말려야 하는데…. 다소간 관계가 어려워 질 것이란 생각은 했다. 하지만 ‘친박이다’ ‘아니다’라는 얘기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기자회견에서 ‘관성에 젖어 거부하지 말라’는 발언이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시각이 많다.
“지금 상황이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어 심리적으로 어떤 얘기를 해도 안 들린다는 뜻이었다. 기자회견 원문을 읽어봐라. ‘타협 없는 주장을 해온 관성과 가속도로 인해 고민 한 번 해보지 않고 바로 거부하지 마시고 이 제안을 숙고해 주실 것을 4개 세력에 간청 드린다’고 돼 있다. 박 전 대표에게만 한 말이 아니었다. 기자회견 후 일문 일답 과정에서 나온 말은 ‘제발 박 전 대표께서 잘 숙고해 달라’는 뜻이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사실상 결별이다’ ‘반란이다’란 표현까지 쓰고 있다. 심정이 어떤가.
“안타깝다. ‘정치 철학이 다르면 친박이 아니라는 발언이 박 전 대표의 뜻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유정복 의원이 ‘어쩔 수 없다’고 한 걸 보면 유 의원의 메시지는 박 전 대표의 뜻이라고 보면 되지 않겠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말했지만 내 발로 걸어 나갈 생각이 없다. 박 전 대표와 나의 관계가 제3자의 입을 통해 정리될 게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주변에서 ‘친박이 아니다’라고 말을 쏟아내는 것이 안타깝다. 그것은 스스로를 비하시키는 것밖에 안 된다.”

-지금 박 전 대표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인가.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 전 대표와 통화는 안 했나.
“사실 대화가 끊긴 지 오래됐다. 지난해 5월 원내대표 출마를 말린 일이 있은 이후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통화한 일이 없다.”

-먼저 전화를 걸거나 찾아갈 수도 있지 않나.
“지난해 원내대표 얘기가 나왔을 때 당을 위해 내가 맡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가 출마를 못하게 했고 나도 그 말을 받아 들였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 냉각기였다. 박 전 대표가 연락을 하리란 생각도 했다. 나는 박 전 대표와 인연을 맺은 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내 인생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정책과 관련한 소신이 다르다고 해서 이렇게 끝내려 한다면 너무 허무한 것 아니냐. 내가 (박 전 대표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이번에도 측근을 통해서 얘기를 듣는 것은 좀 그랬다. 이번 일을 겪는 와중에 박 전 대표 주변에 있는 사람 중 화장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이들도 있을 거다.”

-계파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치를 하려 한다는 말도 나온다.
“자기 지역구를 가진 국회의원이 자기 정치를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걸 가지고 어떤 집단에서 혼자 단독 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비하하는데 그건 유치한 생각이다. 서로 힘을 모아 정권을 잡아야 한다. 또 국회의원은 공적인 사명감이 있는 것 아니냐. 이번 일도 공적인 사명감에서 소신 발언한 것이다.”

박근혜 대표-김무성 사무총장 때 가까워져
박 전 대표와 김 의원이 가까워진 것은 박 전 대표가 2005년 당 대표 시절 김 의원이 사무총장을 맡으면서다. 김 의원은 이 인연을 계기로 2007년 이명박 대통령과의 경선에서 박 전 대표의 곁에 선다. 두 사람은 2006년 무렵 경선 캠프 구성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김 의원은 하루라도 빨리 캠프를 만들자고 했지만 박 전 대표는 반대였다. 신뢰로 묶인 두 사람이었지만 스타일은 판이했다. 박 전 대표는 신중한 반면 김 의원은 직설적인 편이다. 박 전 대표는 원칙을 고수하려는 편이지만 김 의원은 정치는 역동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쪽이다.

후보 경선 때는 김 의원이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았다. 경선이 열렸던 2007년 8월 20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스탠드에 앉아 공식 발표가 나기 전 현장 정보를 입수해 양 후보의 득표수를 세던 장본인이었다. 그 수치는 공식 결과 발표가 되기 전 박 전 대표에게 보고됐다.

김 의원은 2008년 총선 때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한다. 박 전 대표는 공천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고 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 의원은 영남을 중심으로 ‘무소속 친박 바람’을 일으켰다. 살아 돌아온 그는 친박 내에서 좌장 위치를 공고히 했다. 이후 그런대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온 두 사람은 지난해 5월 ‘김무성 원내대표설’이 나오면서 틀어졌다. 당 주류 측이 김 의원의 원내대표 출마를 권유했고 김 의원도 나갈 의사를 보였지만, 박 전 대표가 반대하면서 뜻을 접었다. 김 의원은 이때 상심이 컸다. 당시에는 사람들과 만나서도 가능하면 박 전 대표 얘기를 피하려고 할 정도였다.

이후 냉랭한 기류는 온기로 바뀌지 않았다. 김 의원이 지난해 10월 ‘세종시 신안 찬성’ 입장을 밝히면서 냉기는 더 돌았다.

박 전 대표 주변에 회심의 미소 짓는 이 있을 것
이런 곡절을 겪으면서 박 전 대표도 김 의원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을 것이란 게 주변의 얘기다. 무엇보다 세종시 문제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판에 친박 좌장이라는 김 의원이 세종시를 만든 근본 취지에 대해 생각이 다른 점을 박 전 대표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특히 김 의원이 “관성적으로 거부하지 말아달라”고 얘기한 것은 평소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못한 특유의 어법이긴 하지만 자칫 박 전 대표가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게다가 김 의원은 평소 지인들과 만나 취기가 오르면 박 전 대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이를 박 전 대표가 전해 듣지 않았을 리 없다.

반면 김 의원도 박 전 대표에 대해 섭섭한 면이 없지 않다. 박 전 대표와 인연을 맺은 후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박 전 대표가 그런 점을 잘 알아주지 않는다는 불만이 있다. 또 김 의원은 4선의 중진인 만큼 활동 반경을 넓혀 자신의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원내대표 출마가 좌절됐을 당시 실망이 컸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 의원은 평소 정치는 절충과 협상이란 점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신뢰와 원칙을 앞세운다. 이런 정치적 신념과 스타일의 차이도 두 사람이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게 하는 요인이다.

김 의원이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가까운 점도 갈등의 한 요소로 보는 이도 있다. 김 의원은 상도동계 출신이다. YS는 경선 때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데 대해 두 사람의 소통 문제를 지적하는 의원들도 있다. 한 친박 의원은 “두 사람이 서로 먼저 다가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박 전 대표와 가까이 있는 이들이 만나거나 통화할 기회라도 마련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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