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한 지 2~3시간 된 야채로 식탁 차린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4호 12면

주부 최영희씨가 경기도 일산의 한살림 매장에서 장을 보고 있다. 최씨는 원산지를 살펴 가능하면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구매한다. 최정동 기자

경기도 일산에 사는 주부 최영희(39)씨는 장을 볼 때 생산지를 꼼꼼히 살핀다. 쌀과 채소, 과일이 어디에서 재배된 것인지 확인한다. 그런데 최씨의 관심은 국내산인지, 외국산인지를 넘어선다. 일산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왔는지가 주 관심사다.
“장을 볼 때 생산 지역을 꼭 확인해요. 되도록 일산 근교인 고양이나 파주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고릅니다.”

신토불이 넘어 로컬 푸드 시대로

지난해 11월 말 김장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배추를 주문하는데, 파주산과 다른 지방에서 재배된 배추가 나란히 나왔다. 그는 파주산 절인 배추 10㎏을 주문했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에서 온 배추는 운송거리가 짧으니 환경에 해가 덜 되지 않을까요. 신선함은 덤이죠.” 파주와 일산은 약 30~40㎞ 거리다.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이용하자는 ‘로컬 푸드’ 움직임이 국내에서도 일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미국과 캐나다에서 주목 받기 시작한 로컬 푸드는 장거리 운송을 하지 않는 지역 농산물을 뜻한다. 생활협동조합 한살림 김현경 홍보담당자는 “농산물 이동 거리가 짧아지면 연료 소비와 차량이 내뿜는 CO2 배출량이 줄어 지구 환경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또 생산자는 유통 비용을 줄이고 소비자는 신선한 것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한살림은 원재료의 이동 거리와 발생하는 이산화탄소(CO2)양을 표기한 라벨을 붙여 로컬 푸드임을 표시한다.

소비자 알 수 있게 CO2 감소량 표시
한살림은 지난해부터 전국 77개 매장에서 판매하는 주요 식품에 이색적인 라벨을 붙였다. 원료 산지와 이동거리, 이때 발생하는 CO2 양을 적고, 같은 품목이 수입될 때 이동거리와 CO2 양도 나란히 적었다. 생산지에서 소비자 식탁에 오르기까지 이동거리인 ‘푸드 마일리지’를 표기한 것이다.

참다래(800g) 포장엔 ‘경남 고성 337㎞(CO2 47g), 뉴질랜드 테푸케 9994㎞(CO2 314g)’라는 라벨이 붙는다. 경남 고성에서 재배된 참다래의 푸드 마일리지는 뉴질랜드산 키위의 30분의 1에 불과하고, 수송 과정에서 배출하는 CO2는 6분의 1 수준인 걸 나타낸다. ‘가까운 먹을거리를 선택하면 CO2 267g이 줄어든다’는 설명도 곁들여진다. 이는 TV를 4시간 끄는 효과와 같다. 김씨는 “해당 품목과 비슷한 수입 품목의 이동거리와 CO2 배출량을 비교할 수 있어 푸드 마일리지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가까운 먹을거리를 선택해 푸드 마일리지를 얼마나 줄였는지는 구매 영수증에도 표시한다. 최근 최영희씨가 진간장·두부·콩비지·파래김·보리차 등을 산 영수증에는 ‘줄인 이동거리 3만8943㎞, 줄인 CO2 426g’이라고 찍혔다.

전남 화순에서 양상추와 쌈배추 농사를 짓는 장웅기(50)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하루 일과가 바뀌었다. 새벽에 양상추와 쌈배추를 수확해 이를 싣고 직접 광주 시내 이마트 4개 점포를 돌며 납품한다. 배송을 모두 마치면 오전 10시. 30분 뒤 매장이 문을 열면 장씨의 양상추와 쌈배추는 ‘생산자 직거래 장터’ 코너에서 팔린다. 수확한 지 2~3시간 만에 소비자를 만나게 되는 것. 장씨의 밭에서 출발해 4개 매장을 도는 거리가 50㎞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대구 달성면에서 양파 농사를 짓는 김승엽(53)씨는 양파를 대구시내 이마트 4개 점포에 납품한다. 김씨의 밭에서부터 이마트 4개 매장까지의 거리는 20㎞ 남짓. 이마트에 납품하기 전까지 김씨는 양파를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이나 대구·부산의 대형 도매시장으로 보냈다. 가락동까지의 거리는 약 300㎞. 도매시장에 모인 상품은 경매를 거쳐 전국에 공급됐다. 물론 다시 대구로 내려오는 경우도 많다.

생산자들이 가까운 매장에 납품할 수 있게 된 건 이마트가 로컬 푸드 운동에 동참하면서다. 이마트는 지난해 10월 광주와 대구의 8개 점포에 생산자 직거래 장터를 개설했다. 당일 새벽 수확한 채소를 생산자가 직접 매장에 배송해 판매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이마트는 전국의 대규모 산지에서 상품을 매입해 4개 물류센터에 모은 뒤 이를 전국 120여 개 점포에 뿌리는 중앙매입 방식을 쓴다. 김형기 신선식품 바이어는 “점포에서 가까운 농가에서 상품을 들여오면 중간 유통 과정이 생략돼 가격이 대규모 산지 매입 방식보다 20~30% 싸고, 채소도 신선하게 공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까운 곳에 납품할 수 있게 되면서 농가 수익은 커졌다. 김승엽씨는 “서울 가락동에 물건을 보내면 운송비가 물건값의 10%를 차지하는데, 이마트 대구시내 점포로 배송할 때는 1~2%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고객 반응도 좋다. 김씨가 속한 달성영농조합의 이마트 판매액은 지난해 11월 1000만원에서 12월 1500만원으로 늘었다.

이마트 매장 8곳서도 시범 운영,/b>
로컬 푸드 운동이 국내에서 본격화한 건 최근 몇 년 새 일이다. 중국산 먹을거리 파동, 미국산 쇠고기 문제 등 ‘멀리서 온’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감이 ‘내 고장’ 농산물로 눈을 돌리게 한 것이다.

충남 서천에 사는 심미경(40)씨는 일주일에 두 번 두부를 배달받아 먹는다. 이 지역에 있는 얼굴 있는 먹을거리 영농조합이 매일 아침 두부를 만든다. 콩은 지역에서 재배한 것을 구입해 쓴다. “집에 배달될 때까지도 두부가 따끈따끈해서 맛있어요. 누가, 어떤 원료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으니까 믿음이 가지요.”

조합의 이재국 사무국장은 “대량 생산되는 식료품은 복잡한 유통단계 탓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단절돼 있지만, 로컬 푸드는 생산자를 알 수 있어 ‘얼굴 있는 먹을거리’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정서적 거리도 좁아져 생산자와 소비자가 신뢰를 쌓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일산에 사는 주부 최영희씨는 일 년에 두 차례, 파주에 있는 농산물 생산지를 방문한다. “내 가족이 먹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사람이 작물을 어떻게 키우는지 설명을 듣고 산지를 둘러봐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익명’의 농산물보다 안심이 돼요.”

로컬 푸드는 지역 경제를 살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강원도 원주시는 4월부터 12월까지 매일 새벽 원주천 둔치에서 농업인 새벽시장을 연다. 인근 지역에서 농사 짓는 400여 농가에서 각종 채소와 과일, 쌀, 잡곡, 약초, 나물 등을 가져와 원주 시민들을 대상으로 판다. 원주시 김일중 계장은 “직거래 장터는 도시 소비자들에게 안전한 지역 농산물을 공급하고 농가 소득도 높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한다”고 말했다. 2008년 판매 실적은 61억원, 방문객은 연인원 20만 명으로 집계됐다.

경기도 양평군은 관내 20여 개 학교 급식 재료의 80% 이상을 지역에서 생산된 친환경 농산물로 공급하고 있다. 전북 완주군은 지역 농산물을 인접 대도시인 전주에 공급하기 위한 로컬 푸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서울 송파구청은 이달 말 구내 식당에 ‘푸드 마일리지’ 알림판을 설치하고 자투리 땅이나 옥상·베란다를 활용하는 도시농업을 지원할 계획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