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大藏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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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어윤중(魚允中)이 일본에 간 것은 고종 18년인 1881년이었다.

메이지(明治)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지 16년째 되던 해였다.

그가 눈여겨 본 것은 일본의 관료제도였다.

일본이 부국강병의 근대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효율적인 관료제도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특히 그는 대장성(大藏省)의 역할에 주목했다. 대장성에 대한 '벤치마킹' 을 토대로 '일본대장성시찰기' 란 책을 남기기도 했다.

어윤중이 일본 근대화의 견인차'라며 그토록 감탄했던'로 파악한 대장성이 메이지유신 때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701년 '중국 '당나라의 율령제를 모방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완성하면서 중앙관서조직으로 2관8성을 둔 것이 효시였다.

나라의 살림을 맡는 '큰 곳간' 이란 의미로 대장성을 설치하고 재정과 물자관리.도량형관리를 맡도록 했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적 중앙정부조직의 면모를 갖추면서도 대장성의 명칭만큼은 유지했다.

새해들어 일본이 대대적인 중앙정부 조직개편을 단행하면서 '관청 중의 관청' 인 대장성의 간판을 내렸다. 꼭 1천3백년만이다.

금융.재정.조세정책 권한을 모두 거머쥔 대장성은 미국의 재무부.연방준비은행.연방예금보험공사.회계감사원.증권거래위원회를 다 합한 것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집단으로 군림해왔다.

이번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명칭이 재무성으로 바뀌면서 금융정책과 감독기능.예산편성 기능이 떨어져 나갔다. 대장성의 '철밥통 신화' 도 결국 깨지고 만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와 전후 경제발전을 주도한 최고의 엘리트 관료집단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장성은 1990년대 들어 뇌물과 향응을 둘러싼 오직(汚職)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버블경제' 의 거품이 빠지면서 고질적인 관민.정경유착 구조가 일본 경제위기의 진원이고 그 중심에 대장성이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이번 조직개편으로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일본의 정부조직은 1부(1府)21성(省).청(廳)에서 1부 12성.청으로 대폭 축소됐다.

일본이 이 정도 큰 폭으로 정부조직을 뜯어고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 군정에 의해 강요된 조직개편 이후 처음이다.

변화에 인색한 일본이 대장성의 '아듀' 와 정부조직의 대대적 축소개편으로 21세기를 시작한 것은 예사롭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닌 듯싶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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