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노숙자 위해 그림 내놓은 정수정 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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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노숙자들에게 따뜻한 털옷과 장갑.양말을 입히고 싶은데 가진 거라곤 그림 밖에 없습니다."

대구에서 활동 중인 한국화가 정수정(鄭洙正.46)씨가 노숙자들을 위해 자신의 역작 1점을 내놓았다.

혹독한 올 겨울 대구역 대합실 등에서 추운 겨울을 나고 있는 대구지역 노숙자 70여명을 모른 채 하며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다.

그가 이들을 생각해 그린 작품은 10폭 병풍(가로 4m30.세로 1m35)으로 만든 청도 운문사의 초겨울 풍경. 지난해 11월 그리기 시작해 지난 연말 완성했다.

鄭화백은 3년째 치료받고 있는 폐질환이 지난해 갑자기 악화돼 요양지로 택한 쌍계사와 대구 작업실을 오가게 됐다.

주로 쌍계사에서 휴식을 취했지만 그림에 대한 미련이 남아 한달에 한두차례 대구 작업실에 돌아가 붓을 잡곤 했던 것.

기차로 오가면서 그는 대구역 대합실의 노숙자들을 보게 됐고 '그래도 내 삶이 저들보다야 낫지 않느냐' 며 폐암일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실낱같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몇달 전부터 건강이 점차 회복되자 가장 먼저 노숙자들이 떠올랐다. 희망을 심어준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운문사를 일곱차례나 찾으면서 노숙자를 위한 작품을 그렸다.

하지만 정작 그림을 완성한 뒤 아무리 수소문해도 경제사정이 나빠 누구 한 명 선뜻 사겠다고 나서질 않았다.

"값은 따지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저 대구지역 전체 노숙자들의 추위를 막을 옷을 장만할 정도면 됩니다. 제 그림이 아무리 소중해도 불우한 이웃의 따뜻한 밥 한그릇보다 더 귀하겠습니까. "

1981년 한국미술대상을 받은 鄭화백은 그동안 수차례 불우이웃돕기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해 2월에는 자신의 그림 82점을 기증, 대구에서 무료급식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회를 열었고 5월에는 산불이 난 강릉을 찾아 농산물상품권 5백만원어치와 그림 6점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이 겨울이 가기 전에 그림의 주인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노숙자가 없어지면 소년소녀가장도 줄어들고 무료급식 인구도 줄 텐데…" 라며 애를 태웠다.

대구=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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