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샛별] ‘개인전-나의 서유기’ 연 미술가 이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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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를 읽으며 전시회를 준비한 이피는 “미국 유학생활이 나의 서유(西遊)였다. 심해의 어두운 빛 속에 숨은 경전을 찾아 헤맸다”고 말했다. [이피 제공]

전시장에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향기를 풍기는 미술 작품은 더러 있어도 고린내 나는 설치물은 보기 힘들다. 가까이 다가가니 낯익은 물건이 뒤엉켜있다. 바싹 마른 오징어 다리와 몸통이다. 플라멩코 의상을 입은 무희 같기도 한 여체, 중세 갑옷을 입은 기사처럼 보이는 인물상이 위풍당당하다.

19일부터 서울 안국동 갤러리 아트링크에서 열리는 ‘이피 개인전-나의 서유기(Monkey to the West)’는 엽기적이면서도 자극적인 작품들로 관람객을 긴장시킨다.

“광화문 촛불 시위 현장에 갔더니 사람들이 휴대용 가스버너에 오징어를 구워먹고 있더라고요. 그 순간 오징어가 한국인의 끈질긴 의식의 근육처럼 느껴졌어요. 제목이 바로 떠올랐죠. ‘승천하는 것은 냄새가 난다.’ 오징어는 외국인이라는 명찰을 단 조그만 아시아 여자아이의 초상이기도 하죠. 비천하며 더럽고, 냄새 나며 기괴하고, 물렁물렁하고 깊은 것들 속에서 환하고 높은 이미지를 길어 올리는 것이 저의 오징어 연작입니다. 오징어가 깊은 바다 속에서 휘황한 빛을 발한다는 걸 아세요?”

작가 이피(29)의 본명은 이휘재다. 미국 시카고 예술대학에서 공부할 때 휘재를 발음하기 어려운 동료들을 위해 피 리(Fi Lee)라고 부르라 했다가 굳어져버렸다. 여기서 피는 다소 과격한 자신의 작품 속 피의 이미지와 중첩되기도 한다.

“싫어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오라고 부탁한 뒤 큰 가위로 1시간 동안 300여 명의 초상화를 자르는 행위예술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뒤부터 피의 여인이 됐죠.”

가냘픈 몸피와 달리 그가 부리는 캔버스와 설치물은 대형이다. 작업실 문을 통과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세 토막을 내서 꺼내온 것도 있다. 그의 이런 통 큰 배짱은 이미 어린 시절에 싹을 내밀었다. 1997년 15세 소녀 때 개인전 ‘눈, 코, 입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열어 ‘소녀 피카소’란 말을 들었고, 당시 시인 황지우와 만나 나눈 대담에서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했다. 2001년에는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작품이 실렸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아트 스타 시즌 2’에 뽑혀 작업실과 제작비를 지원받으며 뉴욕 미술계에 적응해가는 내용을 촬영하고 작품을 팔았다.

“거슬러 가고 싶어요. 일상의 단면, 그 한 순간을 정지시켜 공예품을 만든 듯한 이즈음의 미술 작품들로부터 도망가고 싶죠. 긴긴 시간을 실패처럼 둘둘 감아서 들고 가기, 작품에 깃들인 시간을 자르지 않고 뭉치기, 점점 무거워지는 서사 꾸러미를 짊어지고 힘겹게 이 세상을 헤쳐 나아가고 싶어요.”

문학적으로 들리는 이 서술은 피 내림이 아닐까 싶다. 극작가 이강백, 시인 김혜순씨를 부모로 둔 이피는 하지만 “전 오히려 부모님 글 안 읽어요” 했다. 옆에 있는데 굳이 뭘 읽어야 하느냐는 오만이란다. 다만 늘 읽고 쓰는 집안 분위기 덕에 상당히 느리지만 항상 뭔가를 읽고 읽거나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아이 되기, 여신 되기, 짐승 되기를 통해 천연덕스럽게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는 이 조숙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제 안에 검고 따뜻한 짐승 한 마리가 있어요.” 전시는 3월 9일까지. 02-738-0738.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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