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무소득 중에 남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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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충북밀레니엄 원정대가 대륙별로 팀을 나누어 6대주의 최고봉에 각기 올랐다고 한다. 8천8백48m의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감동을 준다.

원정대 깃발 뒤로 눈인지 구름인지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 장관을 보면서 "왜 우리는 목숨을 걸고 저 높은 곳에 오르려 하는가" 라는 물음을 떠올린다.

원정대는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그것을 극복하는 정신력을 보여주는 데 의미가 있다" 고 설명하지만 나는 다른 측면에서 답을 찾고 싶다.

세상에는 별의별 방법으로 탐험 본능을 삭이는 이들이 많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큰 대륙을 횡단하려는 이, 소형 보트를 타고 오직 노를 저어 대양을 건너려는 이, 경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돌려고 하는 이 등이 먼저 생각난다.

두 다리가 없는 장애인도 혼자서 요트를 타고 5대양을 누비려고 한다. 육지나 바다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먼 거리를 가려고 하는 이나 높은 산에 오르려고 하는 이만 탐험가가 아니다.

****빈손으로 내려오는 인생

우리 모두가 탐험가다.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려 하고 높은 빌딩 위에 오르려고 한다. 컴퓨터, 각종 소프트웨어, 인터넷은 물에 젖지 않는 항해장이요, 엔진 소리가 나지 않는 고속 경주장이다. 유전자를 연구하고 질병퇴치 약을 개발하는 이도 또한 뜨거운 정열을 가진 탐험가다.

저 탐험가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는가. 에베레스트에 올라 무엇을 얻는가. 별것 없다. 눈만 보고 내려온다. 사람과 돈과 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마침내는 빈손으로 내려 와야 한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고 외쳐대며 동분서주하던 이, 총칼을 들고 권력의 끝까지 올랐던 이도 마침내 빈손으로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다이아몬드로 밥을 지어먹고 황금 변(便)을 본다 한들,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이 위장을 통과하게 한들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없다.

호기심과 허영심만 달랠 수 있을 뿐이다. 돈과 명예를 얻은 바로 삼는 것은 마치 에베레스트 정상의 많은 눈을 소득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고통스런 삶도 아름답게

반야심경은 "무소득을 터득해야만 지혜가 열리고 공포심이 없어지며 마침내 열반이라는 최고의 평화로운 경지를 얻게 된다" 고 가르친다.

방황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여실히 관찰하면 '나' 라거나 '내 것' 이 허구임을 알게 된다. 얻으려고 하나 얻을 것이 없는 인간은 외롭고 우울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유랑하는 모습 그 자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얼마 전 영면(永眠)에 든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라는 시가 그 경지의 한 단면을 드러내준다. 한 송이의 국화꽃은 소쩍새와 천둥의 울음, 누나의 멀고 먼 방황과 아쉬움, 무서리와 불면(不眠) 등의 산물처럼 보인다.

이렇게 보면 고통스러운 삶이 오히려 아름답게 보인다. 감동을 주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환희가 온 몸에 뻗쳐감을 느끼는 그런 경지다.

화엄경에서 쓰이는 '화엄(華嚴)' , 즉 '꽃의 장엄' 이라는 말은 실제로 세상이 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외로움과 방황과 무소득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는 있다는 말이다. 탐냄.성냄.허영마저 꽃으로 볼 수 있다면 세상의 그 어느 것 하나 꽃 아닌 것이 없게 된다.

금강경도 같은 맥락에서 무소득 가운데서 아름다움을 이끌어내 보라고 가르친다. "집착함이 없이 깨달음의 세계를 아름답게 꾸며서 보라" 고 한다.

윤회 고통의 반대가 해탈 열반이다. 그런데 시공간적으로 둘은 떨어져 있지 않다. 산마루나 욕망 세계의 정상에 올라 얻을 바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가 고해이고, 전체의 실상을 여실히 보고 고통이나 무소득 세계 그 자체가 한 송이의 꽃이요, 불국토의 장엄이라고 깨달으면 그 자리가 바로 열반이다.

석지명(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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