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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차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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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98년 나가노 겨울올림픽. 김동성은 쇼트트랙 10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다. 이때 선보인 신무기가 바로 한쪽 스케이트 날을 앞으로 쭉 내미는 ‘피니시(Finish)’였다. 바로 ‘날밀기’다. 눈 깜짝할 사이인 0.01초로 메달의 색깔이 바뀌는 상황에서 상대 선수들의 의표를 찌르는 마무리였다.

간발(間髮)의 차이는 말 그대로 머리털 하나 차이다. 경마는 ‘코’ 차이로, 스케이팅은 ‘날’ 차이로 승부가 갈린다면 육상은 ‘몸’ 차이다. 현행 올림픽 규정은 머리와 손발이 아닌 몸통이 폭 5㎝ 피니시 라인에서 스타트 라인에 가까운 가장자리의 수직면에 닿은 것으로 순위를 가린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대로 달리는 게 낫겠다는 ‘러닝 피니시’, 가슴을 쭉 내미는 ‘런지 피니시’, 어깨를 트는 ‘슈러그 피니시’ 등 다양하다. 일종의 ‘몸차기’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우사인 볼트가 여유만만한 몸짓으로 피니시를 해 눈총을 받았다. 잘하면 9.5초 벽도 깰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에서다.

올림픽 기록 경기에서 구간 속도가 가장 빠른 종목은 루지 싱글이다. 시속 100㎞를 넘는다. 개막식을 앞두고 그루지야 루지 대표 노다르 쿠마리타슈빌리가 연습 도중 사망한 것도 커브에서 속도를 이기지 못해 튕겨나갔기 때문이다. 다음은 스키 활강이다. 95㎞를 넘나든다. 그러나 순간 최고 속도는 180㎞까지 낸다. 이번 스피드 스케이팅 500m에서 우승한 모태범의 기록은 1, 2차 합산해 69.82초. 시속 51.6㎞ 수준이다. 총알을 탄 사나이 우사인 볼트는 시속 37.58㎞, 금빛 물개 박태환의 400m 기록을 환산하면 시속 6.5㎞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겨울올림픽은 첨단 계측의 무대가 됐다. 이번 밴쿠버 공식 기록측정을 맡은 오메가는 빙상경기에 1초당 2000장의 사진을 찍는 판독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전광판에서 100분의 1초까지 동일 기록이더라도 사진 판독을 통해 2000분의 1초를 가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등장한 회심의 피니시가 ‘날차기’다. 스케이트 날을 들어올려 앞으로 내미는 방식이다. 원조는 캐나다 선수단. 이를 곁눈질로 배운 이상화는 은메달과 불과 0.046초 차이로 금메달을 건다. 날차기 효과가 0.03~0.04초라고 하니 아슬아슬했다.

스케이팅도, 국정도 피니시가 좋아야 박수를 받는다. 얽히고 꼬인 현안도 사뿐한 날차기로 피니시할 수 없을까. 날치기에 점 하나만 찍으면 되는데.

박종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