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 새해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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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옥색 투피스에 가는 반지를 끼고 이희호(李姬鎬·79)여사는 청와대 본관 식당에 나타났다.2001년의 벽두,이제 남은 기간보다 보낸 기간이 더 길어진 청와대 살림을 더듬으며 안주인의 삶과 생각을 엿보고 싶어 중앙일보가 만든 자리.

당초 만남의 장소였던 커다란 책상과 딱딱한 소파가 놓인 접견실에서 부랴부랴 식당으로 옮긴 것은 인간적인 체취가 담긴 진솔한 얘기를 듣고 싶은 기대 때문이었다.

-요즘 답답하시죠.

“예.신문을 보거나 사람들을 만나면 살기 어렵다고들 얘기해요.구조조정으로 해직근로자들이 또 나올텐데 이들 가족이 고생할 것을 생각해도 답답하구요.노숙자들도 외환위기 이후 줄었다가 다시 늘어나고 있으니 사는게 괴로와요.구조조정을 안할 수 있다면 좋은데 모두 어려우니 나라를 살리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하죠.대통령께서도 답답해 하십니다.혼자 서재에서 묵묵히 생각을 하거나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하고 기도하세요.전 내색할 수도 없고 도움이 되지도 못하니 안타깝지요.가끔 ‘조금 쉬고 산책을 하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을 건네는 게 고작입니다.”

-신문에 불만은 없으십니까.

“좋은 의견도 있을 수 있고 비판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지요.그래서 신문을 열심히 읽고 매시간마다 하는 YTN 뉴스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요즘 고위 공직자들의 여성비하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을 보는 데 우리 어머니들이 자녀교육에 주의를 기울여 가정에서부터 성차별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요즈음 드라마엔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주인공으로 여성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더군요.그러나 아직도 일부에서는 성차별적인 여성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성독자나 시청자들이 참가하는 토론이나 좌담기사가 좀 더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게 생각돼요.”

-대통령의 별칭은 인동초(忍冬草)입니다만 여사께서도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까.

“(전혀 망설임 없이)물,그것도 맹물입니다.(웃음)제가 지은 거예요.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죠.저하고 한번 사귄 사람은 변함이 없어요.여학교 시절 상급생 언니가 휴학해 같은 학년이 됐는데 다른 동급생들은 단박에 얘,쟤 하는데 저는 그게 안돼더라구요.”

-후지모리 페루 전 대통령부부는 집권하기 전까진 함께 노력하다가 정상에 오른 후 갈라섰지요.또 인권운동가로 민주화 투쟁을 하는 동지라고 하더라도 부부가 끝까지 함께 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아요.그런데 두분께서는 지금도'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계십니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부싸움을 한다든지 의견충돌을 빚은 적이 전혀 없나요.

“저희는 고난을 통해 다져진 부부입니다.그러나 사람인 이상 의견차이가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그때도 소리내고 싸우지 않습니다.그리고 꼭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겁니다.부부싸움으로 며칠씩 말을 안하거나 짐을 싸서 친정으로 간 일은 약40년의 결혼생활 가운데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사실 저는 어려서 내 형제와 싸운 일은 있지만 남과 싸운 적이 없어요.보기에는 말 걸기도 어려운 인상이라는 얘기를 듣지만 지금까지 화를 내본 적이 없습니다.대통령도 여성을 존중하는 성품이다보니 싸울거리 자체가 적은 편이죠.더군다나 주위에 늘 사람들이 있으니 마음놓고 싸울 수도 없잖아요.”

-굵직한 비리 사건이 터져 나올 때 자제들의 이름이 나오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을 것 같아요.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어 김홍일 의원이 기자회견까지 했습니다만 그런 모습을 볼 때 어머니로서 어떤 심경일지 궁금합니다.

“참으로 (자식이)안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픕니다.우리 내외도 그렇지만 아이들에게도 여기(청와대)들어와 있는 것이 큰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아요. 야당 땐 야당대로,여당일땐 여당대로 한번도 자식들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으니까요.”

-잠깐 동안의 행복과 긴 고난이 이여사의 결혼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고난의 시절동안 결혼을 후회하진 않으셨나요.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젊은 나이에 아기자기하게 가정을 꾸미고 살겠다고 생각해 결혼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이여사는 40세에 결혼했다).이미(험난한 생활을)각오한 결혼이었습니다.”

-직접 쓰신 ‘내일을 위한 기도’라는 책을 보면 고3이던 막내가 말없이 혼자서 고통을 이겨내려 애쓰는 것을 안쓰러워하는 대목이 나옵니다.‘특별한 아버지’를 둔 까닭에 자녀들도 마음고생을 많이 겪어야 했는데 어머니로서 남편을 원망해 본 적은 없습니까.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유신시절에는 취직은 물론 장사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장사하려면 자본금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손님이 와야 하잖아요.그러나 가게에 오는 것만으로도 화를 당할 터인데 누가 오겠습니까. 결혼문제도 그렇지요.그 어려운 시절 우리 큰 아이와 결혼해준 맏며느리와 사돈댁의 용기를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해외순방 등 빽빽한 일정을 모두 소화해내는데 특별한 건강관리법이 있으십니까.

“규칙적인 생활이 비결이라고 할까요.오전 6시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납니다.한번도 초저녁에 잠자리에 든 적이 없어요.늘 자정을 넘깁니다.그렇지만 누워도 곧 잠이 오지 않아서 1시간정도 뒤척이다가 잠이 듭니다.이순자여사는 흔들리면 잠이 잘 온다고 말해줬는데 저는 자동차나 비행기에서도 잠이 잘 오지 않더군요.”

-대통령이 통치사료를 남기듯 여사께서도 행사기록을 남긴다고 들었습니다.어떤 것들을 기록하십니까.

“제가 청와대에 들어와서 놀랐던 것은 역대 퍼스트레이디들이 청와대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그래서 생활기록을 남기기로 했지요.예를 들면 행사자료·대담자료· 연설문· 해외 및 외부 행사 등의 문건은 물론 동영상자료로도 만들고 있습니다.다음에 오는 분이 참고하고 더 나은 업적을 남기게 되면 자연히 우리의 역사도 발전하게 되겠지요.제 활동에 관한 모든 기록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어요.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최근 여사께서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21세기는 지식정보화의 시대이며 여성의 시대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정부도 지식정보화의 도구인 컴퓨터 활용에 주부들이 뒤쳐지지 않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만 농어촌 지역 주부들은 여전히 소외돼 있어요.21세기가 이들에게는 더욱 불행한 시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좋은 지적이예요.정보화 시대가 급속히 진전되는 과정에서 도시보다 농어촌,남성보다 여성이 뒤쳐질 수 있습니다.때문에 정부도 군인·농어촌 주부·여성들에게 정보화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어떤 지역에서는 농촌 주부들이 정보화 교육을 받은 뒤에 농산물이나 가공품을 취급하는 사이버 시장을 개설했는데,아주 호응이 좋았다고 들었어요.

농어촌 주부들이 일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지만 없는 시간이나마 쪼개 컴퓨터를 배울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수상한 ‘올해를 빛낸 한국인 상’상금 2억언을 교육부에 기부해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정보화 교육에 쓰도록 했어요.저 역시 농어촌 여성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정보화 과정에서 소외되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노력하겠습니다.”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턱은 아직도 높은데요.

“숨어 있는 여성인재들을 다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각 분야의 여성인재관리 풀을 만들어 적재적소에 활용하기를 바랍니다.저는 특히 여성장관이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여성발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능력있는 여성이 우리보다 잘한다’고 남성장관들이 평가하면 파급효과가 크지 않겠어요. 물론 여기에 특별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여성 자신의 아이디어와 노력도 있어야겠지요.”

-청와대를 ‘자유가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고 들었습니다.대통령의 아내로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입니까.

“청와대 생활은 책임은 무한대고 자유는 잠시 반납한 상태라고 봐야 할 겁니다.대통령의 책임이 말할 수 없이 크지만 대통령 부인으로서 수반되는 책임도 적지 않거든요.지난 봄 동해안 일대에 큰 산불이 나고,여름에 태풍이 불었을 땐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고 속이 탔어요.반면 태풍피해에도 불구하고 풍년이라고 들었을 때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늘 긴장하며 살고 있다고나 할까요.

어렵게 외환위기를 극복했음에도 경제가 침체돼 실직자와 버려지는 아이들이나 결식아동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는 게 대통령의 아내로서 가장 큰 고통입니다.개인적으로는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써야 하고 친한 분들도 마음놓고 만날 수도,먹고싶은 음식도 먹으러 갈 수도 없죠.형제들을 만나는 것도 어려워 아예 만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국민에게나 국제사회에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힘이 들지요.그러나 이곳에 있는 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취재메모]

이여사는 도저히 팔순을 눈앞에 둔 여성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악수를 할 때 악력(握力)이 기자보다 더 센데다 또박또박한 말투는 허점이 없었다.심지어 50년대 미국유학시절 여름방학엔 하루에 1달러의 급료를 받고 전기코일을 감아 작은 글씨를 써 붙이던 얘기를 여담으로 들려주면서 당시 스테이크가 1달러20센트였다고 말할 정도로 기억력도 대단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었다.정계 거물인 박순천씨와 윤보선씨가 종로에서 맞붙은 지난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씨의 선거지원유세에 나서 당시 홍등가였던 종로3가를 돌며"여성은 여성을 찍자"고 목이 터져라 가두방송을 했던 이여사였지만 요즈음 여성계가 벌이고 있는 호주제폐지에 관해서는 청와대에 몸담고있는 때문인지 ‘개인적인 의견은 있지만‥’이라며 “여러 견해에 대해 관계부처가 의견을 수렴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만 답했다.

만난 사람〓홍은희 논설위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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