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청학동 서당 방학중 초·중생 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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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부생아신(父生我身)하시고 모국오신(母鞠吾身)하시며,복이회아(腹以懷我)하시고 유이포아(乳以哺我)하도다.”(아버지는 내몸을 낳으시고 어머니는 내몸을 기르셨도다.배로써 나를 품어 주시고 젖으로써 나를 먹여 주시도다.)

지리산 자락인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 서당마을에서는 요즘 오전6시부터 사자소학(四字小學)을 읽는 학동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산자락을 크게 울린다.이들은 겨울방학을 맞아 전통 예절과 한학을 배우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초 ·중 학생들이다.

학동들 사이로 한복에 수염을 기르고 탕건(宕巾)을 갖춘 훈장들이 회초리를 들고 돌아 다닌다.짧은 머리·점퍼 차림의 학생만 아니라면 영락없는 조선시대 서당 모습이다.

청학동 도인촌으로 부터 아래쪽으로 약 2㎞에 이르는 계곡에 20여곳의 서당이 흩어져 있다.

이곳 서당에서는 사자소학 ·명심보감 ·추구(推句)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 ·사서삼경 등 조상들이 배웠던 한학과 함께 예절을 가르친다.일부 서당에서는 전통무예,도자기 만들기,판소리,사물놀이,탈춤 등도 곁들인다.교육기간은 대부분 2주지만 1주 과정도 있고 1박2일짜리 주말반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서당인 청학서당 예절수련원(대표 훈장 徐在鈺·40)의 교육과정은 혹독하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오전에는 절하는 법,앉는 자세,명상,수업 순으로 진행된다.오후에는 한자 쓰기,예절실습을 한 뒤 저녁에는 인간의 도리에 대한 강의를 듣고 오후 10시에야 잠자리에 든다.

하루종일 꿇어 앉아 있어야 하고 배운 것을 제대로 낭송 못하면 훈장의 회초리 세례가 쏟아진다.집에 전화를 걸거나 과자를 먹을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단 하루 뿐이어서 어린 학생들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과정이다.

마산 성호초등 6년 孫형선(13·여)양은 “꿇어 앉는 것이 가장 힘들어요.글귀를 외우지 못하면 회초리 맞는 것도 겁나고요.엄마가 보고 싶지만 꾹 참고 있어요”라고 말했다.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보람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처음 며칠동안은 잠자리에서 우는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집에 전화하는 날이 되면 전화통을 잡고 “빨리 데리러 오라”고 떼를 쓰는 어린이도 많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학생들은 놀랍게 적응해 가고 과정을 마칠 때면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의젓한 학생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하루종일 충 ·효 ·예를 바탕으로 ‘바른 인간’을 강조하는 훈장들의 훈계에 개구장이들도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더니 너무 기뻐 하셨어요.”“부모님 심부름할 때 생기는 짜증도 사자소학에서 배웠던 글귀를 떠 올리면 모두 사라져요.”

청학서당의 졸업생들이 홈페이지(http://www.chunghakseodang.co.kr)에 올린 글들이다.

서재옥 훈장은 “인내력이 부족한 요즈음 학생들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가슴에 와 닿는 좋은 글귀를 외우고 의미를 되새기게 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점잖고 의젓하게 바뀌게 된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25년간 훈장노릇을 해 온 명륜학당 이정석(李定錫·48)훈장은 “요즈음 학교 교육은 머리의 양(量)만 키우고 있어 문제”라며 “서당 교육은 먼저 인간을 만들기 때문에 현대 교육체계속에서 꼭 필요한 분야”라고 강조했다.

명륜학당에는 제도권 교육을 포기하고 1∼2년씩 서당 교육을 받고 있는 중·고생도 5명이나 된다.

2년전 4곳에 불과하던 서당이 이제는 20여곳이나 된다.훈장이 되려면 사자소학부터 사서삼경까지 보통 10년 이상 공부해야 한다.하지만 서당들이 난립하면서 요즘에는 전력을 알 수 없는 훈장들이 청학동으로 몰려들고 있는 새로운 문제까지 생기고 있다.

경남 하동군은 올 겨울방학에 7천여명의 학생들이 청학동 서당을 다녀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이들이 뿌리는 수강료는 10억원선.

서당 관리업무를 맡고있는 하동군 사회복지과 이상현(李尙鉉·42)씨는 “현행 법으로 서당과 훈장의 자격과 시설등을 규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지자체가 서당을 제대로 관리하고 지원해 전국의 어린이들을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있다”고 말했다.

글=김상진 기자

사진=송봉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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