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반탁운동의 정신 되새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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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5년 전 12월 28일은 일제의 질곡에서 우리를 독립시켜 준 연합국이 신탁통치(信託統治)를 하겠다는 비보가 날아든 날이다.

해방의 감격과 혼란의 와중에서 이같은 비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을 안겨줬다. 그 순간 전국의 남녀노소 학생들과 민족진영(우익).공산진영(좌익)할 것 없이 혼연일체로 3.1운동 이상으로 신탁통치반대 운동에 나섰다.

필자는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의 위원장으로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선생 등 해외 지도자와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등 한민당 지도자, 전국 사회단체들이 총망라해 임정사무실에 설치한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에 참여했다.

이 때 김구 선생이 "3.1운동과 항일 독립운동은 제1차 독립운동이고 반탁 자주 독립운동은 제2차 독립운동인데 여기에 반탁학련의 백만 원군이 왔으니 반탁 승리로 자주독립을 쟁취하자" 고 격려한 말씀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반탁에 참여했던 여운형(呂運亨).박헌영(朴憲永) 등 공산진영은 3일 만에 일제히 반탁(反託)에서 찬탁(贊託)으로 표변해 버렸다.

이들은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金日成)을 내세워 민족진영인 조만식(曺晩植)선생의 조선민주당을 몰아내고 인민위원회와 인민군을 재빨리 조직, 북한에 적화통일기지를 구축하고 인민정권을 세웠다.

이로써 공산주의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시민.학생들조차 공산당의 정체를 알게 됐으며 반탁투쟁과 함께 반공투쟁까지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으니 반탁은 곧 반공이며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동의어(同意語)가 나오게 된 것이다.

전국을 휩쓴 거족적인 반탁운동에 미.소공동위원회가 해체되고 남북의 자유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한 유엔 한국위원단이 구성됐으나 이들의 입북을 스탈린과 김일성은 거부했다.

이에 따라 부득이 남한 내에서만 압도적인 국민의 참여로 자유총선을 실시, 북한 의석 1백석을 예비로 남겨둔 채 제헌의회(制憲議會)를 구성해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유엔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게 된 것이다.

당시 북에서도 유엔 감시하의 자유총선을 실시했더라면 오늘의 분단의 고통과 6.25 동족상잔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역대 정부가 건국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장기집권 군사독재나 민주정치의 실패로 이어지더니 급기야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과는 상극인 '연방제' 운운하는 통일방안이 떠도는 기막힌 세상이 됐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은 '역사 바로 세우기' 운운했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면서 '제2건국' 을 주장했으나 통일은커녕 내치(內治)마저 실패해 선대가 이룩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국민의 통합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 모두가 대한민국 창업의 원동력인 반탁.반공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망각한 데서 온 자업자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김대중 대통령은 3백만명의 희생자와 5만여명의 미군을 전사케 한 6.25남침과 KAL기.아웅산 폭파 등의 만행을 저지른 테러집단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

또 金대통령은 북한을 비인도.비인권의 전체주의적 병영집단으로 만든 자를 옹호하면서 "김정일(金正日)은 식견 있고 훌륭한 사람" "노벨평화상을 김정일과 함께 수상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고 말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나라의 뿌리인 건국이념과 정통성을 확고히 계승하기 위해서는 반탁기념일을 3.1절 기념행사와 같이 범국민적으로 치러 대한민국의 생성과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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