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현장을 가다] 4·끝 새로운 도약 모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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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출입구에 떡 버티고 선 일본 애니메이션 '인랑' 의 캐릭터 '케르베로스' 전사가 먼저 손님을 맞는 프로덕션 IG 건물. 꼭대기층 컴퓨터실을 찾았을 때 그곳에선 어느 기업의 CM(TV광고)에 삽입할 애니메이션 작업이 한창이었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명작 '공각기동대' (1995)와 일본 최초의 1백% 디지털 영화 '블러드 라스트 뱀파이어' (99)를 만들었던, 일본에서 손꼽히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지만 순수창작만으로는 작업실 운영이 어려워 '아르바이트' 를 하던 중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고민〓성인층까지 끌어안은 폭넓은 내수시장, 할리우드에서도 큰소리치는 국제경쟁력 등 우리 눈에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행운아로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장인정신과 근성으로 작업해온 애니메이터들이 그들의 전통을 이을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매니어 단계를 거쳐 본격 애니메이션에 입문하는 인재는 지금도 많지만 이들의 패기는 예전만 못하다.

그런데다 애니메이션의 주소비층이었던 젊은 세대의 관심사가 눈에 띄게 디지털 쪽으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미야자키' 가 없다〓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주자인 스튜디오 지브리에서도 일본 업계의 위기를 그대로 체감할 수 있었다.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거둬들인 엄청난 흥행수익과 캐릭터 상품 로열티, 모기업인 도쿠마 서점의 지원 등으로 재정적 어려움은 별로 없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만은 다른 제작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다카하타 이사오 이후 지브리가 계속 존재할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다.

지브리의 스즈키 본부장(대표)은 아예 "지브리는 미야자키와 다카하타 두 사람을 위해 세워졌고, 이미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은퇴하면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다" 고까지 말했다. 지브리의 명성을 유지할 젊은 인재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스즈키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활동하던 시대에 비슷한 수준의 천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며 일본영화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것처럼 천재들은 한꺼번에 나온다" 는 이유를 들어 "다음 세기는 더 이상 애니메이션 시대가 아닐 지 모른다" 고' 업계 전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게다가 "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84.미야자키 하야오) '공각기동대' 등 감독들 대부분이 40대에 최고 걸작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21세기 전망은 더 어둡다" 는 말까지 덧붙였다.

일본 영화 사상 가장 큰 흥행을 거둔 '원령공주' 가 1997년작임에도 불구하고 스즈키가 비관적으로 말하는 까닭은 우수한 인재가 게임산업 등 다른 곳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최근 게임산업 역시 불경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한번 그 물에 맛을 들인 인재들은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올 줄을 모른다.

▶애니메이션 외에도 관심거리가 많은 젊은이들〓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인구 자체가 줄고 있다.

여전히 만화왕국의 위치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지만, 95년 이후 애니메이션의 바탕이 되었던 출판만화의 덩치까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일본 만화산업의 인프라로 자주 언급되는 만화주간지 '소년 점프' 역시 90년대 중반 6백만부에 육박하다가 지금은 3백50만부로 추락했다.

라디오와 TV가 새 매체에 최고 인기 자리를 내주었던 것처럼 애니메이션 역시 게임이나 인터넷 등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문화생산자들이 던져주는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보다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점차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싫증을 내고 있다는 풀이다.

아직까지는 어린이에서부터 20~30대 이상의 성인층까지 고루 만화를 보고, 좋아하는 캐릭터를 다시 극장에서 보는 즐거움이 어떤 맛인지를 알고 있지만 10대 후반들이 점차 관심을 잃어가고 있어 과연 앞으로도 애니메이션 시장이 지금 같을지 의문을 품게 한다.

▶열악해지는 제작환경〓 '인랑' 의 오키우라 히로유키 감독은 "할리우드 제작사들은 충분한 예산과 제작기간, 많은 스태프를 동원해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지만 일본은 스태프가 턱없이 부족할 뿐더러 대우도 형편없다" 며 "이 일이 좋아서 한다는 것 외에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장점이 별로 없다" 고 말했다.

"열여섯 살에 시작해 서른네 살인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애니메이터 일을 해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장당 가격은 거의 변함이 없다" 는 오키우라의 말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외적 성장의 결실을 종사자들이 고루 나누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도 미래는 있다〓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정점을 지나 주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태양이 지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오히려 탄탄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국제시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의견도 많다.

그런 예로 최근엔 아예 해외시장을 겨냥해 외국에서 먼저 선보이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국내시장의 위축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로 삼고 있는 것 같다.

도쿄〓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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