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37) 평양서 발견한 전쟁 준비 문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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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연합군의 지원군 본대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 미군은 공중 공격으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일단 힘을 기울였다. 1950년 7월 3일부터 이틀간 북한군을 맹렬히 공격했던 팬더 제트기가 일본에서 발진한 항공모함 갑판 위에서 날개를 펼치며 이륙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생각해 보면 6·25 전쟁은 준비가 충실한 적 앞에서 준비가 없던 대한민국이 경황 없이 맞은 전쟁이었다. 밑으로는 일반 사병, 위로는 최고 지휘관과 대통령까지 모두 적을 막기 위해 나섰지만 준비가 없었던 대한민국은 엄청난 피를 흘려야만 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북진에 북진을 거듭해 평양에 입성했을 때다. 최초로 평양에 발을 들여놓은 군대는 우리 국군 1사단이었다. 그 사단장이던 내 앞에 낯선 미군 부대가 나타났다. 1사단이 평양에서 적 잔여 병력에 대한 일대 소탕작전을 벌인 직후였다. 그 부대원들은 미 2사단의 ‘인디언 헤드’ 마크를 달고 있었다. 선임자였던 포스터 중령이 증명서를 내보였다. 그들은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가 파견한 ‘문서 수집반’이었다.

그들은 평양에 있던 공공건물을 죄다 뒤지고 다녔다. 적들이 남긴 문서류는 모두 수거했다. 김일성의 집무실에서 북한이 운영했던 말단 행정기구까지 그 모든 것이 대상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온 문서 하나가 있다. 나중에 나는 이 문서를 직접 봤다. 한마디로 놀라웠다. 그 문서는 일종의 남침 계획서였다.

내 눈길을 끈 내용은 대한민국 각 행정 소재지의 군(郡) 단위까지 1950년도의 농작물 예상 수확량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었다. 쌀·보리 등 모든 곡물의 예상 수확량이 적혀 있었다. 그들은 그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거둬갈 식량의 규모, 즉 공출량을 계산한 상태였다. 놀랍게도 주식이 아닌 깨까지 군 단위별로 예상 수확량과 공출량을 매겨 놓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이 반격을 못하고 북진하지 못했다면 적들이 점령한 전 지역에서 나오는 농산물은 그들이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면 전쟁은 거의 끝장이었다. 먹고살 것이 없는 대한민국은 미국이 어떤 방법으로 지원을 하더라도 커다란 난관에 부닥쳤을 것이다.

북한은 그런 치밀한 준비 끝에 남침을 해온 것이다. 치밀한 준비성은 다른 곳에서도 엿보였다. 역시 낙동강 반격 이후 북진할 때 본 북한의 주택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당시는 대부분 초가지붕이었다. 임진강과 개성을 넘어 북으로 진입하면서 본 북한의 초가지붕은 곧 무너져 내릴 상태였다. 5년 동안 지붕의 볏짚을 전혀 바꾸지 못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북한은 군비 확충에 혈안이 돼 있어서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바꿀 만한 여유도 허용하지 않은 것이었다. 일제시대 때 처음 닦았던 신작로(新作路)는 그 폭이 남한 신작로의 두 배 정도 돼 보였다. 전쟁 준비를 위해 길을 크게 넓혀 놓은 것이었다.

국군이 전혀 보지 못했던 탱크를 미리 마련했고, 사거리가 훨씬 긴 122㎜ 대포를 준비한 점 등 무기와 장비 면에서 북한이 남한을 얼마나 압도했는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어땠나. 정말이지 대비라고 할 게 별로 없던 수준이었다. 북한의 도발을 전혀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다. 50년에 들어서서 비상상황은 여러 번 발령됐다. 특히 적이 쳐들어 온 6월 들어서는 초순부터 비상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적이 남침을 시작한 25일의 전날인 24일에 갑자기 비상이 풀렸다.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한 것이다. ‘당시 부대에 남아 있던 장병의 수는 군의 복무규정과 육본의 요구 범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남아 있던 장병마저 긴장감이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는 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내린 평가다.

50년 5월 육본의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이 아군과 적의 병력·장비를 비교한 뒤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제출했던 ‘긴급 건의서’도 국회가 그해 5월 30일의 선거로 휴회 중이어서 처리하지 못했다. 6월 초 이뤄진 군 고위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새로 전선 사단에 부임한 지 며칠 안 되는 지휘관들이 전쟁이 터진 뒤 그 사단을 제대로 지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적의 침공에 대비해 만들었던 방어 계획서가 전쟁 발발 3개월 전에 작성됐다는 점도 대한민국이 얼마나 준비 없이 북한의 남침을 맞았는지 잘 보여준다. 38선을 넘은 적이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있기 전까지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온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준비 없이 전쟁을 맞는 결과가 어떤 참상으로 번지는지를 잘 알아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물은 엎질러졌다. 그를 어떻게 수습하느냐는 그 국민의 역량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잣대였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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