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은 하늘 꼭대기에, 농민은 땅바닥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3호 33면

1. 1918년 6월 베이징대학 철학과 제2회 졸업생들과 함께한 25세의 량수밍 교수(앞줄 오른쪽 둘째). 교장 차이위안페이(앞줄 오른쪽 넷째), 문과대학장 천두슈(앞줄 오른쪽 셋째)의 모습도 보인다. 『중국철학사』의 저자인 펑여우란(둘째 줄 왼쪽 넷째)도 이날 졸업했다. 2. 1921년 량수밍의 결혼기념 사진. 김명호 제공

1946년 1월 국·공 양당이 정전협정을 체결하자 량수밍은 8년 만에 다시 옌안을 찾았다. 마오쩌둥은 영수급 10여 명을 황급히 모아 량의 말을 경청하게 했다. 량은 내전 반대를 주장하며 입에 침이 마르는 줄도 몰랐다. 이들이 내전에 승리해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52>

3년 후 신중국이 수립됐다. 량수밍은 “지식인들이 천하대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정치는 복잡하기가 이를 데 없다. 열정과 능력은 별개다. 소신이라며 세상일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말실수 하기 딱 좋은 곳이다. 앞으로 나 개인만을 대표하지 어떤 조직도 대표하지 않겠다”며 자신이 정치에 문외한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말은 해도 행동은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량수밍에 대한 예우는 극진했다. 첫 번째 소련 방문에서 귀국하자마자 중난하이로 그를 초청해 정부에 참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거절당했지만 잠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을 뿐 밥 때가 되자 “오늘 저녁은 통일전선이다. 소식(素食)을 하자”며 모두에게 외쳤다. 량은 소식가였다.

량수밍은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다녔다. 자신이 펼쳤던 향촌건설운동의 근거지들을 둘러보고 동북(東北)과 서남(西南)지역의 토지개혁도 직접 참관했다. 마오는 량이 베이징에 들를 때마다 환대했지만 한번도 구체적인 임무를 준 적이 없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다니며 조사하고 연구하게 내버려뒀다.

53년 9월 정협과 중앙인민정부 확대회의가 열렸다. 량은 농촌공작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다. “근 30년간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공은 농민들에 의지해 농촌을 근거지로 삼았다. 공작거점이 도시로 이전하면서 농촌은 황폐해졌다.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은 개선되었지만 농민들은 질곡을 헤맨다. 도시로 나오려 하지만 도시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있지만 농민들은 땅바닥을 기어 다닌다.”

다음 날 마오는 즉석발언을 했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있다. 농민들의 생활이 어렵다며 그들을 돌봐야 된다고 한다. 공자나 맹자가 얘기하던 어진 정치(仁政)를 펴라는 의미다. 대인정(大仁政)과 소인정(小仁政)을 모르는 사람이다. 농민을 배려하는 것은 소인정이다. 중공업을 발전시켜 미국을 타도하는 것이 대인정이다. 우리가 수십 년간 농민운동을 펼쳤음에도 농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니 웃기는 말이다. 노동자와 농민의 근본적인 이익은 일치한다. 분열과 파괴는 용납될 수 없다.”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지만 량수밍을 호되게 비판했다.

량수밍은 충분한 발언시간을 요청했다. 참석자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 반대하자 표결을 제의하는 사람이 있었다. 거의 전원이 량의 발언을 반대했다. 마오는 찬성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날로 끝이 났다. 13년 후 문혁이 시작됐다. 량수밍의 집에도 홍위병들이 들이닥쳤다. 량의 부인을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두들겨 패면서도 량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매달 나오던 돈도 3분의 1로 삭감됐지만 잠시였다.

72년 12월 26일 마오의 80회 생일에 량수밍은 '중국, 이성의 나라'의 친필 원고를 선물로 보냈다. 마오는 량을 대면이라도 한듯 즐거워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순금이 없는 것처럼 완전한 인간도 없다”며 20여 년 전 량의 행동을 양해했다. 량수밍도 80년대 중반 “당시 나의 태도가 적절하지 못했다. 그를 힘들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그동안 적막을 견디기 힘들었다”며 평생 의견이 맞지 않았던 마오를 회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