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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수밍과 마오쩌둥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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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호 33면

량수밍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건강이 좋아졌다. 1986년 93세 때의 모습. 김명호 제공

중국의학원 설립자 위안훙서우(袁鴻壽)는 101세 생일에 제자들 앞에서 한마디 했다.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은 현대 중국의 운명을 좌우했지만 영향력은 한계가 있다. 동시대 인물로 영원히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량수밍(梁漱溟) 외에는 없다”는 말을 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51>

량수밍은 1911년 중학 졸업과 동시에 학생 생활을 끝내고 잡지사에 취직했다. 19세 때였다. 의회정치에 관심이 많아 자정원(資政院)에 회의가 있는 날이면 빠지지 않고 방청했다. 위안스카이의 대총통 취임식도 직접 취재했지만 한결같이 꼴불견투성이였다. 불교 경전을 가까이하기 시작했다. 인생과 사회에 관한 고민이 그를 괴롭혔다.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세 되던 해 정월 시안(西安)에 내려가 소식(素食)을 시작했다. 부친과 형에게 출가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저는 전생에 승려였나 봅니다.”

1916년 9월부터 동방잡지에 ‘구원결의론(究元<51B3>疑論)’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동서고금의 사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가 23세의 청년을 교수로 모셔왔다. 중졸이지만 학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량수밍은 인도철학을 강의하며 철학연구소 내에 공자사상연구소도 개설했다.

당시 베이징대학에는 기라성 같은 학자가 많았다. 일본과 영국에서 10여 년간 유학생활을 한 양화이중(楊懷中·昌濟)도 후난성 창사의 성립사범학교에서 베이징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량수밍은 양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해질 무렵 양의 집 대문을 두드릴 때마다 후난 방언이 심한 삐쩍 마른 청년이 문을 열어줬다. 눈인사는 나눴지만 통성명은 하지 않았다. 지방에서 올라온 친척이겠거니 했다. 이 청년은 대화에도 끼어드는 법이 없었다. 후일 “사범학교 시절의 학생이다. 베이징대학 도서관에서 한 달에 8원씩 받으며 잡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름은 금세 까먹었다.

1938년 1월 옌안의 량수밍과 마오쩌둥. 두 사람은 동갑이었다.

양화이중의 딸이 항상 량수밍을 배웅했다. 뭔가 뒷골이 이상해 돌아보면 후난 청년이 표정 없는 얼굴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양화이중은 3학기 만에 세상을 떠났다. 량수밍과 동료 교수들이 출자한 돈으로 장례를 치렀다. 량은 장례기간 동안 분주하게 오가는 후난 청년을 봤지만 얘기는 나누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자 청년도 베이징에서 자취를 감췄다.

20년이 흘렀다. 그간 량수밍은 유·불(儒·佛) 양가를 오가며 중국 신유학의 기틀을 닦았고 도시에서 성장한 사람답지 않게 전국을 누비며 향촌건설운동을 폈다. 농촌에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국공합작이 실현되자 항일론자였던 량수밍은 공산당의 본거지 옌안에 호기심을 느꼈다. 특히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 궁금했다. “어떤 사람들이기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까?” 공산주의 경전들을 섭렵한 적이 있었지만 계급투쟁으로는 중국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에 공산주의 학설을 신봉하지 않았지만 리다자오, 장선푸 등 중공의 창시자들과는 가까운 친구였다.

국민참정원 자격으로 옌안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견을 장제스에게 제출해 동의를 받았다. 중공 측에서도 량수밍이 오는 것을 환영했다. 옌안에 도착한 량을 중공 총서기 장원톈(張聞天)이 직접 맞이했다. “주석은 낮에 쉬고 밤에 일한다. 밤에 만남을 주선하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마오가 중공혁명군사위원회 주석임을 처음 알았다.

처음 만난 날 마오의 첫마디는 어처구니없었다. “우리는 20년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양화이중 선생의 집을 방문하실 때마다 제가 문을 열어 드렸습니다. 그 후 저는 양 선생의 사위가 됐습니다.”

두 사람은 동굴 속에서 중국사회와 미래에 관한 얘기로 꼬박 밤을 새웠다. 마오는 계속 술을 마시며 량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워낙 개성들이 강하다 보니 일치되는 점이 하나도 없었다.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상대를 설득하는 데는 모두 실패했지만 화들은 내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 상쾌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두 번째 만남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여덟 번을 만났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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