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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스이, 최대 파벌 교통계 등에 업고 나라 좌지우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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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33면

1914년 량스이(앞줄 왼쪽에서 다섯째)와 함께한 교통계 중진들. 량스이는 용모가 평범하거나 키가 큰 사람들을 싫어했다. 김명호 제공

19세기 중반부터 중국을 강타한 외우(外憂)와 내환(內患)은 봉건왕조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중앙의 권위에 허점이 보이자 각양각색의 정치집단들이 출현했다. 정당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 존재했던 붕당(朋黨)과도 성격이 판이했다. 청(淸)황실은 이들에게 핵심 권력을 잠식당했다. 교통계(交通系)는 30여 년간 중국 최대의 파벌이었다. 청 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1927년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정치·경제·외교 등 모든 분야를 장악해 다른 계파들을 압도했다. 시작은 량스이였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50>

1903년 6월 서태후는 숨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강희제와 건륭제가 했던 것처럼 경제특과(經濟特科)를 실시했다. 34세의 량스이가 최고 점수를 받았다. 량의 고향은 광둥(廣東)성 산수이(三水)였다. 서태후는 광둥 출신이라면 무조건 싫어했다. 신정(新政)을 펴려면 친정(親政)을 해야 한다며 황제를 부추기다 외국으로 도망간 캉여우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의 고향이 광둥이었다.

베이징의 사대부 사회를 들었다 놓을 정도로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량스이가 량치차오의 동생”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자 광둥인들에게 편견을 갖고 있던 서태후는 그대로 믿어 버렸다. 가만히 보니 이름도 수상했다. 두 글자가 눈에 거슬렸다. 梁에서 시작해 '로 끝났다. 캉여우웨이의 여러 이름 중 하나가 쭈이였다. 서태후는 시험관들의 보고서를 있는 힘을 다해 바닥에 내팽개쳤다. 소문의 진위 따위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경제장원(經濟壯元)이 아니더라도 량스이는 9년 전 대과에 급제한 진사(進士)였다. 당시 정부는 진사들에게 ‘한림회향 진흥교육정책(翰林回鄕 振興敎育政策)’에 참여할 것을 권장했다. 최고의 지식인인 한림(翰林)들을 고향에 보내 교육에만 전념케 하는 제도였다. 관직은 맡기지 않았다. 엉터리 같은 선생들의 엄청난 파괴력을 일찌감치 체득한 민족다운 교육정책이었다. 량도 고향의 서원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량은 고전과 함께 재정·교량·농업 등 실학을 가르쳤다. 서원도 신식학교로 바꿔버렸다.
량스이는 비록 낙방했지만 ‘경제장원’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톈진에 있던 직례총독 위안스카이가 량에게 눈독을 들였다. 보물 다루듯이 모셔왔다. 오죽했으면 “량스이를 데려오기 위해 위안스카이가 서태후의 속을 긁어놨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작달막한 키에 생긴 것들도 비슷했다.

날개를 단 량스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위안스카이 병서(袁世凱兵書)’를 저술해 북양집단에 발을 들여놓은 후 인도로 향했다. 영국과 끈질긴 협의 끝에 ‘장인협약(藏印協約)’을 체결해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임을 재확인시켰다. 능력을 인정한 정부는 량을 우전부 소속 철로총국 국장에 임명했다. 외교적인 능력이 필요한 자리였다.

신해혁명 덕에 정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량스이를 총통부 비서장에 기용했다. 내정과 외교를 관장하며 교통은행 총재도 겸했다. 다들 ‘이총통(二總統)’이라고 불렀다. 중국혁명의 아버지 쑨원도 량의 눈치를 봤다. 쑨과 위안은 13번 만나 국가대사를 논의했다. 량도 항상 동석했다. 세 사람은 황당하고 치밀한 것 외에도 ‘실업(實業)이 곧 구국(救國)’이라는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만나면 서로 말이 통했다. 쑨이 철도청장에 해당하는 자리를 요구하자 위안은 즉석에서 전국의 철도건설에 관한 전권을 쑨에게 위임했다.

중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두 사람의 비중을 생각해 보면 엉뚱하기가 이를 데 없는 제안이고 수락이었지만 철도·은행·전보·항만을 장악한 교통계의 수령 량스이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량은 전국철도협회 회장 자격으로 쑨의 철도건설계획을 적극 지지했다.량스이는 위안스카이 사후 몰락하는 듯했다. 량은 전국에 수배령이 내리자 홍콩으로 도피했지만 다음 정권에서 다시 기용됐다. 이러기를 네 차례 반복한 부도옹(不倒翁)이었다. 위안스카이·쉬스창·장줘린·돤치루이를 비롯해 장제스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국가원수 어느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량스이는 평생 신문을 보지 않았다. 대신 마작판을 벌려놓고 세상 소식을 들었다. 교통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유언비어 치고 사실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1933년 홍콩에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평생 명예와 모욕을 지고 다녔다. 이 지구상에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지만 뭘 잘했고 못했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처자들의 비석을 내 무덤 옆에 세워라”는 유언을 남겼다. 7명의 부인 중 가장 어린 부인은 90년대 말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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