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상과 투혼으로 뭉친 창조적 파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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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평일 정오에 방송되는 일본 모 방송국의 오락 프로그램. 이 프로의 중심은 유명 인사와의 토크다. 출연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캐치프레이즈는 ‘세계로 넓히자, 친구의 윤(輪)’이다.

일본 아사히 기자가 만난 한국 CEO #“일본 CEO는 한계 확실 … 한국 CEO의 무한도전 인상적”

필자는 2005년 4월부터 3년간 일본 아사히 신문사의 한국 특파원으로 일했다. 당시 이 프로그램 방식을 응용해 한국의 많은 CEO를 만날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CEO는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다.

그를 인터뷰했을 때 동북아시아 지도를 선물 받았는데, 일반 지도가 아닌 북쪽과 남쪽이 거꾸로 된 것이었다. 김재철 회장은 “이렇게 한반도를 보면 마치 유라시아 대륙에 서있는 반도처럼 보인다.

대륙의 부두처럼 말이다”며 한국이 바다를 지금보다 더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한 사람은 문국현 유한킴벌리 전 사장이었다. 문 전 사장은 “북한의 질 좋은 노동력을 이용해 경제를 개발하고 개방할 수 있다면 일본과 한반도 그리고 아시아는 더 강력한 역동성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핸드백 제조업체를 이끌고 있는 박은관 시몬느 대표도 인상 깊었다. ‘역경을 오히려 기회로 만든’ 그의 경험담은 감동을 주기 충분했다. 박 대표는 이탈리아 명품 백 공장에서 장인들의 고령화를 본 후 “한국에서 대신 만들겠다”고 경영진에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절망 그 자체.

“made in Korea로는 고급 이미지가 나지 않는다”며 단칼에 거절했던 것. 하지만 박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역사에선 늘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함께 역사를 만들자”고 수차례 제안해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시몬느는 이제 이탈리아 회사가 기대는 존재로 거듭났다.

박 대표의 굳은 의지가 시몬느를 세계적 회사 반열에 올려놓은 셈이다. 이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한국 CEO의 장점은 역발상과 역경을 기회로 만드는 힘이다. 요즘 일본 CEO들에겐 없는 것이다. 역발상과 역경을 기회로 만드는 전략은 어쩌면 무모한 도전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한국 CEO의 이 전략은 위기 탈출을 이끌고 있다.

일본 CEO의 특징인 관리 및 원칙경영이 위기상황에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만약 일본 CEO가 도전적 마인드를 갖추지 못한다면 2~3년 후 일본은 어려움을 겪을지 모른다. 필자가 느낀 한국 CEO의 또 다른 특징은 오너 경영이라는 제한적 틀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일본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오너 경영의 장점은 빠른 경영판단과 조율능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독단·독선 경영으로 흐를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가 만난 오너 후계자는 준비된 CEO였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그런 인상을 줬다. 필자가 정 부회장을 만난 것은 CEO가 되기 훨씬 전의 일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중국을 비롯한 해외 진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새로운 비전을 가다듬고 있었다. 요즘 한국의 오너 2, 3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이 오너 경영의 장점을 살릴지, 아니면 한계를 드러낼지는 아직 모른다. 오너 후계자 중 가장 먼저 CEO 대열에 합류한 정용진 부회장의 행보가 이들의 미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지 않을까.

가미야 다케시 아사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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