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론] 북한 주적론 바뀌려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최근 국방부가 발간한 2000년도 국방백서가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한 데 대해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대화와 협력의 상대방을 주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북남관계를 대결로 몰고 가는 반통일적 행위" 라고 비난했다. 또 이를 철회하지 않으면 남북합의가 제대로 진척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남북화해 시대에 북한 주적론은 시대착오며 남북화해에 걸림돌이 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 개최된 제4차 장관급 회담은 큰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어 이번 사태는 일단 찻잔 속의 태풍으로 지나가는 듯하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이렇게 넘어간다 해도 남북대화 시대에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남는다.

북한은 국방백서가 규정하듯이 우리의 주적인가, 아니면 조평통이 주장하듯이 대화와 협력의 상대인가.

이 질문은 비단 국방정책과 관련된 것일 뿐 아니라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 더 나아가 우리의 대북정책 방향과 직결되는 문제다.

이는 주한미군의 지위와도 관련되는 문제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 대북 적대정책을 포기할 것을 요구해왔고 북한이 생각하는 적대정책의 요체는 북한을 주적으로 보는 주한미군이다.

만약 우리가 북한을 더 이상 주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면 한.미연합군의 군사목표도 수정돼야 하며 이는 항간에서 얘기하는 주한미군의 지위변경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사람은 복잡한 문제일수록 간명한 해답을 원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분명히 평화와 통일 논의의 상대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안보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기도 하다.

이러한 북한의 2중적 측면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화 상대로서 북한이 부각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북한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월간중앙' 이 최근 입수해 보도한 미8군의 북한군 전력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남북화해 무드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전쟁태세는 지난 1년간 오히려 강화됐다.

특히 북한군은 지난 8~9월 10만명의 병력과 1천8백대의 전차를 동원한 1990년 이후 최대 규모의 기동훈련을 실시했으며 분단 사상 최초의 남북한 국방장관 회담이 개최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도 훈련은 계속됐다.

기동훈련을 실시한 이유에 대해 내부용이니 대미 협상용이니 하는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국방책임자는 상대의 모호한 의도가 아니라 능력을 보고 대비해야 함을 감안한다면 국방백서의 북한 주적론은 남북대화에도 불구하고 타당성이 줄지 않았다.

각인된 주적 이미지(enemy image)가 분쟁해결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상대가 분명히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상대를 적으로 규정할 경우 평화정착의 기회를 놓치고 분쟁을 연장시킬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변하지 않았는데도 주적관을 바꿀 경우 현실과 괴리된 상대의 이미지는 안보의식을 이완시켜 궁극적으로 안보를 해치게 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상대가 진정으로 변했는가에 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간 평화를 정착시킨 캠프데이비드 협정이나 동서냉전의 종식은 사다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근본적인 사고전환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모두 기존정책의 근본적 수정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때 발상의 전환을 했다.

경직된 주적관으로 한반도 평화정착의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능력을 비롯한 위협의 실체에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주적관을 바꾸는 것은 우리 안보를 손상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주적관을 고치기 이전에 남북한 평화공존에 대한 북한의 진정한 의도를 시험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으로 하여금 평화공존 외에는 대안이 없음을 절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 주적론과 철저한 안보태세는 남북관계의 걸림돌이 아니라 북한으로 하여금 기존 대남전략의 근본적 수정 외에는 대안이 없음을 깨닫게 해 오히려 한반도 평화정착에 기여할 수 있다.

백진현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