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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설리번 선생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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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한빛맹학교 음악전문학과 신현동 교수는 온몸으로 시각장애인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 학생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 손가락의 움직임을 일러준다. [오종택 기자]

앞을 못 보는 소년이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연주했다. 악보는 외웠지만, 감정 표현은 서툴렀고 손놀림은 기계적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선생님이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누르는 손가락의 무게와 빠르기를 느껴보렴.” 소년은 선생님이 가르쳐준대로 그 곡을 다시 치기 시작했다. 음색은 명쾌해졌고, 톤은 좀 더 묵직해졌다.

소년은 올해 시각장애인으론 처음 서울대 피아노과에 입학한 김상헌(19)군이다. 2005년 한빛맹학교 중학과정에서 가장 피아노를 잘 치던 김군은 같은 맹학교 대학과정의 피아노 담당인 신현동(43) 교수를 만나면서 악상 기호를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초등부터 대학 과정까지 있는 이 맹학교에 갓 부임한 신 교수는 김군을 특별 지도하기로 했다.

“재능은 있었지만, 악보를 볼 수 없으니 끝까지 칠 수 있는 곡이 많지 않았어요.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해야하는 게 급선무였죠.”

점자 악보를 읽을 수 없었던 첫 2년 동안은 직접 왼손과 오른손 연주를 각각 녹음해 들려줬다. 멜로디를 외워오면 손목, 팔, 어깨의 움직임을 가르쳤다. “늘 누군가와 부딪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세가 굳어 있었어요. 제가 연주할 때 움직이는 근육을 만져보도록 했습니다.” 상헌이는 입시 준비 막바지였던 지난해 가을, 피아노가 정말 좋아졌다고 했다. 어릴 적 자폐증상이 있어 말수가 적던 아이가 이제는 피아노로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표현한다.

신 교수도 어릴 적 ‘가난’이라는 장애가 있었다. 잘 먹지 못해 체격이 작았고, 성격도 소심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피아노를 처음 접했다. 살면서 ‘잘한다’는 칭찬도 처음 들었다. 신 교수는 추운 예배당에서 하루 8시간씩 혼자 연습해 강릉대 피아노과에 들어갔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연습벌레로 살았다. 건국대 대학원, 독일 유학을 마치고 대학강사로 일하다 맹학교로 왔다. 그는 “힘들었지만 새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했다. 지난해엔 ‘시각장애인의 피아노 교육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 교수는 “지독하게 가난했기 때문에, 아이들의 고통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창 예민할 나이라 상대적 열등감이 많아요. 비장애인처럼 초견(악보를 보자마자 읽어서 연주하는 것)도 할 수 없고, 100% 암기를 해야 하니 스트레스가 많아요.”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상담사 역할을 했다.

신 교수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남겨두고 이번 달 말 가족과 함께 동남아시아의 한 가난한 나라로 떠난다. 그곳의 시각장애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어서다. 초등학교 특수교사로 일하는 부인과 함께 지난해부터 준비했던 일이다.

“선교활동을 하는 친구가 ‘동남아는 장애아동에겐 특히 힘든 곳’이라고 했어요. 한국은 내가 아니더라도 도와줄 사람이 있지만, 그곳은 특수교육의 불모지잖아요. 그 나라에도 제 도움이 필요한 ‘헬렌 켈러’가 있을 겁니다.”  

글=김효은 기자 ,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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