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시위로 부채탕감 할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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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부채 탕감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어제로 예정됐던 서울 여의도 집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됐지만 경찰과 농민간 충돌과 도로점거 등이 일부 지방에서 벌어졌다.

그저께 밤에도 농기계 반납.밤샘농성이 있었다. 농촌을 이렇듯 황폐화시킨 농정 실패에는 정부 책임이 크다.

"부실 기업.은행에는 1백50조원씩 쏟아부으면서 왜 우리는 외면하느냐" 는 지적에는 정부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분통이 터져도 공공기물을 부수고 교통에 지장을 주는 식의 비합법적이고 과격한 행위는 옳지 않다.

이미 정부와 정치권은 부채 탕감 특별법 제정에 합의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협의 중이므로 결과를 지켜보는 게 마땅하다. 행여 압박하면 더 얻어낼 수 있으리란 기대로 집단시위를 벌인다면 이는 오산이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데는 특히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이번이 여섯번째인 부채 탕감은 정치논리의 산물이었다. 선거 때마다 부채 탕감 공약은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았다.

또 평소엔 관심도 없다가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니까 장관을 불러 호통치고 특별법 제정에 앞장서는 정치권이야말로 농정을 흔드는 파괴자라 할 만하다.

한나라당이 민주당보다 많은 지원을 주장한 데 이어 예산심의과정에서 퇴장하는 '쇼' 까지 벌인 것도 무책임한 짓이다.

농민들은 수차에 걸친 부채 탕감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런 정치쇼가 진정으로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 부채 탕감 계획이 나오겠지만 이 역시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식 처방이 될 것이다. 농민부채 문제가 몇년 주기로 되풀이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차제에 근본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시장이 개방된 상황에서 농업이 자체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는 점은 다 아는 일이다. 그렇다면 장기적인 마스터 플랜을 세우고, 이 틀 안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살릴 것은 과감한 지원으로 육성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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