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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4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41. 한탄바이러스 영화

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의 소립자에서 광년(빛이 1년 동안 달려야 도달하는 거리)의 은하계까지 물질계에 대해선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과학기술이 왜 사람의 몸에 대해선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을까. 첨단의학도 감기 하나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은 물질과 달리 연구자의 의도대로 자유자재로 실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인도적이며 윤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쥐도 실험에 사용할 땐 매년 연구실에서 위령제를 지낼 정도로 연구자의 마음은 개운치 않으니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사람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할 수 있다면 의학은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극악무도한 일본 731부대의 인체실험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나는 1989년 10월 세계보건기구의 유행성출혈열 자문관 자격으로 중국의 하얼빈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은 매년 8천여명의 유행성출혈열이 발생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나는 그 곳 위생국장의 소개로 악명높은 일본 731부대가 있던 핑팡(平房)이란 곳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그 곳은 상상 외로 거대한 규모였다. 철도와 비행장이 깔려 있었을 정도였으며 상주 인원만 2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1997년 골드라는 미국인 작가가 써서 미국에서 출간된 '731부대의 진상' 에 따르면 731부대에서 희생된 중국인 인간 마루타가 무려 3천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1947년 미육군조사관 힐중령이 도쿄에서 작성한 731부대 보고서에 따르면 36년부터 43년까지 731부대에서 만든 인체표본만 해도 페스트 2백46개, 콜레라 1백35개, 유행성출혈열 1백1개 등 수백개에 이른다.

당시 731부대 사령관인 기타노중장은 일본 정부가 만주에 세운 수도 신징(新京)시의 만주의대 교수로 위장근무하면서 731부대를 지휘했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중국정부가 731부대 건물 안에 만든 작은 기념박물관을 나오면서 현관에 있던 방명록에 '천인공노(天人共怒)' 라고 썼다.

위생국장이 한마디 쓰라고 부탁해서 쓴 것인데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내가 미생물학자였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순간 동행했던 중국 학자들과 눈이 마주쳤으며 우리 모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발견한 한탄바이러스는 세균전 무기론 안성맞춤이었다. 쥐의 배설물을 통해 공기로 전염되므로 급속히 퍼질 수 있는데다 치료제도 없으며 높은 치사율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탄바이러스를 다룬 영화도 많이 소개됐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영화 '마루타' 와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든 미국의 '아웃브레이크' , 공상과학영화 '엑스파일' 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를 만들 무렵 만주나 한국 일대에서나 유행하는 풍토병인 줄 알았던 한탄바이러스가 미국과 남미 일대에 우연히 유행했는데 영화감독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이를 인용한 것이었다.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을 맡아 국내에도 개봉된 아웃브레이크는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한 마을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엑스파일은 외계인이 한탄바이러스를 세균전으로 사용한다는 내용이다. 마루타는 일본군 731부대에서 잔인무도하게 세균실험을 한 사실을 다룬 한국영화다.

비록 영화에선 한탄바이러스란 종(種)의 이름이 아니라 상위 개념인 한타바이러스란 속(屬)명으로 언급되긴 했지만 한타 역시 한탄이란 이름에서 비롯된 것은 물론이다.

독자 여러분도 혹시 영화를 보게 된다면 영화 속에서 언급된 한타바이러스가 한국인 과학자가 발견해 붙인 이름이란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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