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사막 남극을 찾아서](19)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세종기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남극 연구를 위해 세종기지를 찾았던 하계대원들이 기지를 떠나고 있다. 필자와 기지에 들어온 이후 국회의원들과 정부조사단을 비롯해 유지보수작업팀, 하계연구팀 등 적잖은 이들이 기지를 찾았다. 임무교대를 위해 2개 차대 월동대원들이 함께 머무르고 연구를 위해 세종기지를 방문한 하계대원들까지 합하면 60명이 넘는 인원이 세종기지에는 있었다. 식사 때마다 빈 테이블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하지만 이제 세종기지에는 많았을 때 사람 수의 절반인 30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사계절 중 날씨가 가장 따뜻한 여름이 끝나가면서 겨울을 나는 월동대원을 제외한 하계대원들이 시나브로 세종기지를 떠나고 있는 것.

남극의 한 자리에 위치한 세종기지에는 기상 상태 때문에 들어오기가 힘들다. 하지만 나가기도 무척이나 어렵다. 세종기지의 여름은 기상이 무척 불안정하다. 적도에서 불어오는 따듯한 바람과 남극대륙의 차가운 바람이 만나는 남위 60도 근처에 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기상상태가 불안정하면 갑작스러운 돌풍과 함께 낮은 구름이 깔리면서 수십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적지 않다.

그래서 세종기지에 들어오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푼타 아레나스에서 며칠씩 대기하며 비행기를 기다리는 경험을 한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세종기지가 위치한 킹조지 섬 상공까지 와도 낮은 구름과 돌풍 때문에 착륙하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하계 대원들도 일주일 동안 칠레 공군기를 타고 세종기지로 왔다가 기상 탓으로 3번이나 푼타아레나스로 되돌아 가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단 한 번의 시도 끝에 세종기지로 들어올 수 있었던 필자 일행은 운이 좋았던 셈이다.

세종기지를 떠나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 유지보수 작업을 마치고 한국을 향해 떠난 대원들도 가방을 ‘쌌다 풀었다’를 여러 번 되풀이 한 끝에 세종기지를 떠날 수 있었다. 엊그제 떠난 하계 대원들도 블리자드 때문에 출발이 이틀이나 연기됐다. 차라리 배를 이용해 세종기지를 떠나는 편이 일정에 차질이 없을 때도 있다. 그래서 일정이 정확하게 짜여진 사람들은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나갈 때도 있다.

세종기지를 떠나는 이들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 칠레 공군기지로 간다. 길게는 2~3개월 세종기지에서 머무르며 대원들과 기지에 정이 깊이 든 까닭에 작별의 모습은 항상 애틋하다. 월동대원들도 하계 대원들을 배웅하기 위해 일손을 놓고 부둣가에 모두 모인다. 칠레 공군기지로 향하는 보트는 세종기지를 떠나는 하계대원들의 아쉬움을 달래주듯 기지 앞바다에서 원을 세 바퀴 돈 뒤에야 출발한다. 세종기지에서만 행해지는 작별의식이다. 초상을 치룬 뒤 상여가 자기 살던 집을 한 바퀴 돈 뒤 장지로 이동하는 것과 비슷한 셈이다. 남은 대원들은 찬바람이 불지만 떠나는 이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 대원들이 떠나고 나면 북적북적하던 기지가 휑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보트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남은 대원들은 기지 이곳저곳에 모여 떠난 대원들과 만든 추억을 얘기한다. 세종기지를 떠난 이들의 빈자리를 수다로 메우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사는 세상의 끝 남극 세종기지도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한국 속담이 가장 잘 들어맞는 곳이다.

박지환 자유기고가 jihwan_p@yahoo.co.kr

*박지환씨는 헤럴드경제, 이데일리 등에서 기자를 했었으며, 인터넷 과학신문 사이언스타임즈에 ‘박지환 기자의 과학 뉴스 따라잡기’를 연재했었다. 지난 2007년에는 북극을 다녀와 '북극곰도 모르는 북극 이야기'를 출간했다. 조인스닷컴은 2010년 2월까지 박씨의 남극일기를 연재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