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4단 허정무, 바둑으로 월드컵을 말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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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허정무 감독

허정무(57) 축구대표팀 감독은 아마 4단의 실력을 지닌 바둑의 고수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출전을 앞둔 그의 축구엔 바둑의 전략, 심리전, 수읽기가 어떤 식으로 녹아 있을까. 지난달 말 허 감독을 만나 궁금증을 풀어봤다.

바둑이라는 창에 비친 축구는 어떤 모습인가. 축구에 바둑의 지혜가 도움이 되는가. 코앞에 닥친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이란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떤 비수를 준비하고 있을까.

- 지피지기(知彼知己)는 병법의 기본입니다. 한데 한국의 객관적 전력은 월드컵 B조에 편성된 아르헨티나·그리스·나이지리아 네 팀 중 가장 처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랭킹 차이도 까마득해서 바둑이라면 대단히 비관적 상황입니다. 해외 한 언론은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을 10% 아래로 보고 있던데 국내 분위기는 영 다릅니다.

“그게 축구와 바둑의 차이지요. 바둑이라면 우리는 아르헨티나에 10전10패겠죠. 하지만 축구는 의외성이 높습니다. 바둑돌은 내 마음대로 갖다 놓을 수 있지만 축구는 11명의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쉬지 않고 살아 움직입니다. 순간 상황이 90분 내내 이어집니다. 그만큼 변수가 많아지는 거지요. 어떤 상대라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 그러고 보니 ‘두려움’이 문제로군요. 두려움이란 승부의 가장 큰 적이고 쉽게 떨칠 수 없는 존재지요. 바둑에선 두려움을 느끼는 상대를 이기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축구도 그건 비슷합니다. 우리가 유럽이나 남미 팀에 약했던 것도 미리 겁을 먹은 탓이 컸지요. 선수들이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것은 감독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배짱은 타고나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청용이나 기성용은 배짱 좋은 선수들이지요.”

-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의 4강 신화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최근 박지성·박주영·이청용·기성용 등 해외파의 활약을 보면 다시 그런 기적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한국이 B조 네 팀 중 꼴찌라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게 됩니다.

“기막힌 기억이죠. 히딩크 감독의 승부수가 적중했고, 전체적으론 홈에서 열린 대회라 가능했다고 봅니다. 해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딱 1승을 거둔 게 전부입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토고를 이긴 것이지요. 하지만 바로 여기에 해답이 숨어 있습니다. 비록 외국에서 열리는 대회라도 충분히 준비해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자신감에 차 있으면 ‘홈 어드밴티지 상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 바둑의 지혜가 축구에 도움이 되나요. 허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바둑 격언은 무엇입니까.

“시야를 넓게 가지고 판 전체를 봐야 한다는 점에서 바둑과 축구는 똑같습니다. 사소취대(捨小取大)나 상대의 강한 곳에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것 역시 평범하지만 실전적 진리지요.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는 격언입니다. 먼저 뚫려버리면 제아무리 공격이 화려해도 아무 소용이 없지요.”(이 격언은 이창호 9단의 방어적 승부호흡이다. 또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꼽히던 유창혁 9단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조훈현 9단이나 이세돌 9단 같은 결정력 좋은 선수들은 다르다. ‘공격은 최상의 방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화려한 개인기를 지닌 쪽은 당연히 위험한 승부를 즐긴다. 허 감독이 아생연후살타를 좋아한다는 것은 한국 축구의 개인기와 결정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 바둑이 추구하는 최상의 상태는 ‘두터움’입니다. 축구에도 두터움이 존재합니까.

“있지요. 아무리 돌파해도 켜켜이 막아서는 팀, 그건 두터운 팀이지요. 축구에도 조훈현 9단의 ‘흔들기’가 존재하는데 그런 흔들기에 가볍게 뚫리는 팀은 엷은 팀이지요. 개인기가 팀 안에 녹아들 때 두터움은 만들어집니다. 그건 바로 아생연후살타와도 통하는 얘기이고 저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 선수 선발 등 월드컵을 향한 포석은 얼마나 진척됐습니까. 상대팀에 대한 비책은 .

“첫 경기인 그리스 전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는 조직력이 좋은 팀이고 바로 두터운 팀입니다. 수비를 튼튼히 한 다음 역습을 노리는 전략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이번 대결은 다릅니다. 우리도 그리스를 이겨야 하지만 그리스도 16강 진출을 위해선 우리를 꼭 이겨야 하기에 그들의 전략을 ‘수비 위주’라고 단정해선 안 됩니다. 누가 오래 참느냐, 언제 승부수를 던지느냐, 심리전이 치열할 겁니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냉정하게 말한다면 한국 축구는 세계무대에선 아직 ‘하수’이고 그래서 목표가 16강일 겁니다. 국민적 여망을 등에 지고 16강을 이뤄야 하는 허 감독의 고심이 느껴집니다. 바둑의 경우 먼 변방의 하수였던 한국 바둑이 순식간에 세계를 제패했죠. 축구에서도 언젠가는 그런 기적이 가능할까요.

“한국 축구는 말씀대로 아직은 하수입니다. 그러나 한국 축구는 겁 없는 하수이자 나름대로 신화를 이뤄 본 하수입니다. 16강을 이뤄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운이 따른다면 그 이상도 기대합니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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