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관치 논란’ 다시 기름 붓는 금감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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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금융감독원이 만들어 은행에 발송한 ‘성과보상체계 모범규준’에 담긴 내용이다. 여기서 ‘금융기관’이란 물론 은행이다.

이를 놓고 잠잠해지나 싶었던 관치 논란이 다시 불거질 조짐이다. 후계자를 키우는 프로그램을 도입하라는 것은 해석하기에 따라 상당한 폭발력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강정원 국민은행장의 KB금융 회장 내정자직 사퇴 이후 은행들은 감독당국의 의중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다음 달 임기가 만료되는 신한금융지주 라응찬(72) 회장의 연임 여부는 금융계의 최대 관심사다. 금감원은 “경영진의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는 입장이지만, “금감원이 이 조항을 빌미로 최고경영자(CEO) 선임에 개입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문구 하나에도 관치 논란이 생기는 것은 KB금융에 대한 사전검사에서 무리를 한 금융당국이 자초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은행들의 대응도 아쉽다.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국내 은행들은 자체 신용으로 달러를 조달하지 못해 정부의 달러 지원과 외화 지급보증까지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은행들은 지난 1월 ‘보상체계 및 성과지표 개선을 위한 자율기준’을 마련했고, 여기에 경영진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을 마련한다는 내용을 넣었다.

이미 1년 전에 한 약속이다. 이에 따라 일부 은행은 임원 후보를 발굴하기 위한 과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CEO 승계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개한 곳은 없다. 그러는 동안 금감원이 강제력 있는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것이다. 모범규준이라곤 하지만 금감원의 은행 경영평가에 반영되므로 은행으로선 지키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의 씨티그룹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지배구조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사회 내에 구성되는 ‘후보 추천 및 지배구조 소위원회’는 매년 CEO 승계 프로그램과 관련한 보고서를 만들어 이사회에 제출해야 한다. CEO 역시 정기적으로 위원들과 만나 잠재적인 CEO 후보를 추천하고 이들을 평가해야 한다. 이 정도 절차를 투명하게 갖추면 관치가 비집고 들어가기 어렵다.

요즘 국제적으로 은행에 대한 규제와 감독을 강화하는 흐름이 대세다. 은행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관치의 빌미를 줄 수밖에 없다.

김원배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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