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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초콜릿과 진흙과자를 넘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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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최근 우리 방송과 신문들이 쏟아 내는 아이티 대지진 관련 보도를 접하면서 느끼는 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량 사망, 무정부 상태, 부정부패, 약탈 횡행, 폭력, 폭도, 치안 부재, 약육강식의 구호물자 쟁취…. 온갖 부정적 상황이 한꺼번에 도출된 비운의 땅이라는 인식을 우리 머릿속에 가득 채운 처참한 비극 일변도의 뉴스들. 물론 지옥 같은 재난 상황을 연일 가감 없이 보도한 덕에 전 지구촌에 국제적인 구호의 손길이 가능했을 것이고, 신속한 지원이 잇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재앙 속에서 세계인들에게 비친 아이티인은 어떤 모습일까? 질서 의식도 정의도 사라진 열등한 종족, 이기적이며 비겁한 폭도에 불과한 흑인들, 저주받은 땅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국민…. 기아의 상징처럼 돼 버린 진흙과자 보도를 필두로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내용 일변도의 보도가 결국엔 아이티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부각하고, 무의식적으로 인종차별적 의식을 조장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계의 뉴스 공급을 지배하는 서방 통신사에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뉴스 대부분을 홍수·가뭄·지진·해일 등 천재지변과 테러·쿠데타·데모·대형사고 같은 사건만을 주로 다룬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돼 왔다. 세계의 정보를 독점하는 선진국 통신사들은 그들의 입맛대로 여과하고 재단하고 왜곡 처리한 뉴스를 전달함으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방식을 부여하고,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식민주의 행태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아이티의 진흙과자 못지않게 피폐한 시절이 있었다. 미군 병사들을 쫓아다니면서 초콜릿을 구걸하는 코흘리개 아이들, 거지가 득실거리고 좀도둑이 판치는 거리,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야비한 행태를 일삼는 사람들. 한국전쟁을 패러디하고 가난한 시절의 한국인을 비하한 미국 TV 시리즈물 MASH에 나타난 그 시절의 우리 모습이다. 극히 부정적인 모습 일부만을 확대해 편향적인 시각을 심어준 이 코미디 드라마는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줬다.

이번 아이티 참사에서 우리 미디어의 보도 태도도 반성할 점이 많다. 아이티라는 나라가 흑인 노예들의 손으로 이뤄진 최초의 독립국이며, 우리 어르신들이 미군에 초콜릿을 구걸하던 그때 대한민국을 원조해 줬던 나라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보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폐허에 갇혀 쓰러진 와중에도 ‘어머니의 목소리를 느끼고’ 살아야겠다는 의지 덕분에 구출됐다는 고백과 같은 아이티 젊은이들의 강한 생명력에 초점을 맞춘 뉴스는 많지 않다. 지진으로 부서진 처참한 현실에 주저앉은 모습만 부각해서는 안 된다. 재난을 딛고 일어서려는 그들의 용기와 노력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참혹한 현실에서도 꺾이지 않는 아이티 국민의 꿈과 희망을 전해야 한다.

제발 사람들의 호기심이나 감정을 자극하는 선정적 내용으로 ‘영혼이 없는 저널리즘’이라는 비판을 받는 센세이셔널한 보도는 피해야 한다. 우리도 웬만한 곳에는 특파원을 파견해 직접 취재하고 보도할 형편이 됐다. 우리식의 국제 보도를 모색해야 한다. 한국전의 초콜릿과 아이티의 진흙과자를 넘어서는 재난 보도에 눈을 돌려야 한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겠느냐는 비아냥 대신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에서도 장미꽃은 피어난다는 희망을 심어야 한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와 불굴의 용기를 전하고 북돋우는 것이야말로 언론이 견지해야 할 소중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김정기 한양대 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