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해서 … 째려봐서 … 잇따른 ‘아무나 저격’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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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해 11월 20일 태평양의 관광지 사이판 섬에서 관광객 4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한국 관광객 8명도 부상을 입었다. 범인은 중국 국적의 리모(42)씨. 그는 도로에 차를 멈춘 채 창문을 열고 13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리씨는 범행 직후 자살했다. 경찰은 “사격장에서 일하던 리씨가 사업 실패 등을 비관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불특정 상대를 겨냥한 ‘스나이퍼(저격수)’형 범죄였다.

최근 이와 비슷한 범죄가 국내에서도 잇따르고 있다. 총을 구하기 어려운 한국에서는 살상용 총이 아닌 공기총이나 새총 등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특별한 동기가 없는 ‘묻지마’ 사격이란 점에서 외국의 ‘스나이퍼’형 범죄와 비슷하다.

서울 노원경찰서는 1일 고무줄 새총으로 쇠구슬(지름 6.35㎜)을 발사해 행인들에게 타박상을 입힌 류모(41)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류씨는 2008년 10월부터 3층 자신의 집 창가에서 승용차 유리창이나 아파트 창문을 노렸다. 새총의 위력은 살상 무기에 버금갔다. 자동차 유리창은 박살이 났다. 맞은 사람은 다행히 총알이 급소를 비켜갔지만 팔에 부상을 입었다. 류씨는 15회에 걸쳐 362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줬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몸이 아픈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외부 활동을 거의 못했다. 답답해서 일주일에 한두 차례 새총을 쏘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류씨의 직업은 미국산 고무줄 새총을 수입해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는 것이었다.

경기도 안산단원경찰서도 이날 이웃 주민을 공기총으로 쏴 숨지게 한 혐의(살인)로 박모(45)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박씨는 지난달 31일 오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H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아파트 주민 권모(50)씨를 공기총으로 쏴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박씨는 사고 당일 주점을 운영하는 부인이 늦게 귀가한다는 이유로 전화로 부부싸움을 했다. 그는 납탄 7발을 장전한 공기총을 들고 부인이 운영하는 주점으로 가던 중 권씨에게 공기총을 쐈다. 자신을 째려봤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경찰 관계자는 “박씨가 ‘째려봐서 쐈다’고 말했다가 ‘술에 취해 왜 쐈는지 모르겠다’며 범행동기에 대해 왔다 갔다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18일엔 이모(32)씨가 경기도 성남시 자신의 아파트(11층)에서 50m 정도 떨어진 놀이터를 향해 공기총 20여 발을 쐈다. 고등학생 한 명이 허벅지에 총알을 맞았다. 우울증 병력이 있는 이씨는 경찰에서 “놀이터에서 노는 소리가 시끄러워 위협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자신의 불만을 남에게 표출하는 도시인들의 ‘공격성’에, 자신을 감추고 남의 고통을 관찰하는 ‘관음증’이 결합된 범죄라고 분석한다. 경찰대 표창원(범죄심리) 교수는 “자신은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고통을 보며 야릇한 쾌감을 느끼는 범죄 심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같은 범죄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에게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김효은·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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