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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두 개의 도장 없애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문제의 다발이다. '검은 돈' 다발의 문제라 해도 무방하다.

천민(pariah)자본주의에서 시작해 지금 겨우 패거리(crony)자본주의를 지나는 중이니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인다. '망하기 위해 일어선 나라' 라는 혹평에는 입을 닫아야 할 뿐이다.

러시아에서 말하는 '트리시카의 웃옷' 을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다. 다 닳은 팔꿈치에 덧댈 요량으로 소매를 오려 붙여 웃음거리가 된 이후, 다시 소매에 재킷의 밑자락을 잘라 붙이고…. 결국 트리시카의 웃옷은 누더기가 되는 꼴 말이다.

지금 나라 모양새가 그러하다. 어느 썩은 부위을 도려내고 나면 다른 곳이 곪아 터진다. 다시 거길 추스르고 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잠복해 있는 염증까지 떠올리면 아예 손을 놓아야 할 판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비리의 마지막 비상구는 어김없이 권력을 가진 자들과 맞닿아 있는 것일까.

정현준-이경자씨로 대표되는 사건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일단은 금융감독원이 쑥대밭이다. 군데군데 벤처 기업가들이 유탄(流彈)을 맞아 나뒹굴고 있다.

인터넷 사이버 공간을 낡은 체제의 대안으로 삼고자 했던 닷컴 쪽 인재들이 당한 좌절은 더 심각하다.

한 닷컴 기업인은 "인터넷 벤처로 이 땅의 총체적 부패구조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희망은 사라졌다" 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신음을 흘려 놓는다. '두개의 도장 없애기' 다. 하나는 허가서류의 머리를 장식하는 도장. 다른 하나는 관료사회로부터 번져 우리 조직사회 전체를 뒤덮다시피한 눈도장이다. 둘은 교묘하게 엉켜 조직적 비리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알다시피 허가서의 도장은 권력이다. 여러 비리사건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검은 돈' 에 의해 변신을 거듭한다. 상투적인 전술은 애매모호함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상급자는 자신의 의중을 먼저 드러내는 법 없이 "뭐 다른 방법 없어" 라는 한 마디만 내뱉는다.

하급자는 그 말의 행간을 읽어내기 바쁘다. 눈도장이 따라 붙을 수밖에 없다. 윗사람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 뱅뱅 돌지 않으면 무능력자로 추락하는 탓이다. 이 와중, 현장은 텅 비게 마련이고 음모는 조직화하기 일쑤다.

거창하게 행정 전산화를 논할 이유도 없다. 노트북 컴퓨터를 하나씩 안겨 바깥으로 내몰면 어떨까. 어디서든 e-메일로 일과를 체크해 아래 위로 답장을 보내면 된다. 일상의 결재서류에 대해선 현장에서 전자사인으로 대응하면 그만이다. 중요한 사안일 경우 물론 사무실에서 머리를 맞댈 일이다.

비록 개별적인 차원이지만 그 실험의 결과는 이미 나와 있다. 한 중앙부처 국장급 공무원의 말을 옮겨 보자. "미국 연수를 끝내고 들어와 e-메일로 현안을 논의하고 최종 결론을 내리길 계속했다. 어느 샌가 의사결정은 투명해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e-메일 대화록이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모두들 남아 넘치는 시간을 처치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까지 갔다" 고 실토한다.

이는 e-메일이 관료사회의 '소리 없는 전복'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확신에 다름 아니다. 누구든 '눈 도장' 을 포기해 '눈밖에 나는' 부하직원을 어여삐 여길 수 없을까. 차관보다 장관이 나서야 파급효과는 커진다.

대통령이 청와대 의사결정 시스템을 그렇게 만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위로부터의 e-메일 전복' 은 문제의 다발을 금방 '꽃 다발' 로 흩어지게 할 수 있을 터다.

허의도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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