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칼 금감원] 下. 감독 흔들리면 개혁 '부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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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헌재(李憲宰)초대 금융감독위원장은 재임 시절 "금융감독원에서 뉴스거리가 나오지 않아야 경제가 잘 돌아가는 것" 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뇌곤 했다.

현실은 어떤가. 최근 '정현준 게이트' 로 금감원은 연일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권위와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그간 수면아래 잠복해 있던 온갖 문제점들이 드러나는 상황이다.

금감원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면 당장 연내로 예정된 2차 금융구조조정은 물론 금융개혁 자체가 공염불로 끝날 수밖에 없다.

금융부실을 막는 마지막 안전판인 금감원의 부실 감독은 곧바로 금융기관 부실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공적자금을 쏟아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금감원 개혁과제는 크게 ▶부패고리 차단▶인력.조직 전문화▶효율적 조직개편 등 세가지로 요약된다.

◇ 부패방지 시스템 강화 시급〓우선 내부통제 시스템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 감독당국에서 근무했던 한 정부 관계자는 "미국의 경우 예컨대 몇십달러 이상의 식사나 선물은 받지 못하도록 하는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내부윤리규정으로 정해 이를 엄격히 지키도록 하고 있다" 며 "감사팀이 수시로 무작위 점검에 나서 위반사실이 적발되면 그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액수가 크면 곧바로 사법당국에 고발된다" 고 말했다.

금감원에도 '윤리강령' 과 '직원행동규범' 이 있지만 내부규정도 아니고 단순히 선언적 의미에 불과해 그야말로 안지켜도 그만인 정도다.

자체 감시도 소홀하다. 1천4백63명이나 되는 직원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감사실 직원은 17명이 전부다. 감사실 관계자는 "암행단속은 꿈도 못꾸고, 자발적인 신고나 도덕 교육에 치중하는 정도" 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금융연구원 고성수 박사는 "국내 감독당국이 자체 감사를 통해 직원 비리를 적발해낸 경우는 한 건도 없다" 며 "무작위.상시 감사제도를 도입해 자체 정화기능을 높여야 한다" 고 강조했다.

◇ 전문성 높여야〓삼일회계법인의 미국인 임원인 밥 그라프 이사는 "미국의 감독기관들은 신참 검사역에게 최소 1년6개월~2년의 실습과정을 거치도록 한 뒤 검사를 내보낸다" 며 "한번 업무를 맡기면 전문성을 키울 수 있도록 10년 이상 놔두는 게 보통" 이라고 말했다.

이에 비해 금감원은 국제금융이나 전자금융 등 일부 분야에서는 검사대상 금융기관 직원으로부터 '배워가며' 검사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4개 감독기관 통합 때 직원 화합을 이유로 보험담당을 은행으로, 은행담당을 증권으로 보내는 등 업무를 뒤섞은 게 큰 이유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전문인력 부족은 전체적인 인력부족과 맞물린 문제" 라며 "자체 교육프로그램을 강화할 수 있도록 인력을 늘리는 한편 내부의 비전문가를 외부 전문가로 과감히 대체해야 한다" 고 말했다.

실제 최근 문제가 된 신용금고 검사는 20여명의 직원이 1백62곳을 담당하고 있다.

이는 1인당 금고 8곳 꼴로, 미국 등 선진국의 1인당 금융기관 평균 1~2곳에 비해 크게 열악한 수준이다.

인력난을 덜려면 감독업무와 본질적인 관련이 없는 금융.기업 구조조정 업무는 재정경제부 등에 넘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서강대 조윤제 교수는 "금융감독은 예컨대 위험대출에 대해 엄격히 충당금을 쌓도록 지도하는 일인데 현재 금융.기업 구조조정은 거꾸로 기업지원에 주력하고 있다" 며 "금융감독을 제대로 하려면 금감원에서 금융.기업 구조조정 기능을 떼내야 한다" 고 말했다.

◇ 금감위.금감원 분리도 필요〓금융연구원 지동현 박사는 "금융감독위원회는 금융 정책을, 금융감독원은 집행을 맡도록 돼 있으나 금감원장이 위원장을 겸직토록 해 내부통제가 불가능한 것이 문제" 라며 "금감원의 잘못된 집행을 금감위가 자체 적발.규제할 수 있도록 원장.위원장직을 분리해야 한다" 고 말했다.

또 금감위가 갖고 있되 사실상 집행기관인 금감원이 휘두르는 금융기관 인.허가권도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LG경제연구원 이한득 책임연구원은 "금감원이 건전성 감독과 인.허가권을 모두 가지는 등 권한이 너무 커짐에 따라 부정이 싹틀 소지가 커졌다" 며 "재경부 등으로 인.허가권을 떼어내는 게 바람직하다" 고 말했다.

이정재.정경민.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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