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한글로 세계문명을 바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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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위대한 한글날을 맞이해 가슴을 쭉 펴고 큰 뜻을 모아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 세계 최고의 문자로 꼽히는 한글을 수출해 세계문자지도를 바꿔보는 게 어떨까. 동북아의 문자를 한글 알파벳으로 통일해 동양문명을 한글문명으로 재편하고, 사라져 가는 소수언어 종족들에게 한글 알파벳을 선사해 세계 언어자원을 보존하자는 얘기다.

이렇게 말하면 한글전용론자의 문화국수주의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문화국수주의로는 이런 포부를 품을 수 없다. 우리는 세계의 문화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최근의 초고속 정보화는 한글 알파벳의 세계화를 요청하고 있다. 이제 수세적인 문화국수주의에서 벗어나 공세적인 문화세계주의를 펴나가는 게 좋겠다.

지난 세기부터 정보통신기기가 급속히 발달하자 동양권은 문자공포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최근에 초고속 정보화시대로 접어들자 서양권조차 문자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초합리적인 한글 알파벳을 쓰는 우리만 빼놓고 말이다.

1960년대에 타자기가 상용화되자, 글자 자모수가 많은 국가에서는 문자공포증에 시달렸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글 자모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한글을 풀어쓰자는 제안이 속출했었다.

1980년대에 컴퓨터가 일상화되자 문자공포증이 사라졌다. 아무리 복잡한 문자라도 컴퓨터가 그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만은 예외였다. 수만자의 한문 글자를 찍으려니 글자판을 간소화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휴대전화 시대가 도래하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대다수 국가가 또다시 문자공포증에 시달리게 됐다. 요즈음 모든 정보통신기기가 휴대전화로 통합되고 있다. 휴대전화에는 단추가 12개밖에 없다. 휴대전화로 모국어를 완전하게 전송할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다. 사실 우리는 단추가 8개만 있어도 된다. 모든 모음자는 . ㅡ ㅣ 의 세 글자로 만들 수 있고, 모든 자음자는 ㄱ ㄴ ㅁ ㅅ ㅇ 의 다섯 글자로 만들 수 있다. 우리가 휴대전화 최강국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로마자는 구성원리가 원시적이다. 모양만으로는 자음자와 모음자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니 휴대전화 단추마다 섞인 순서대로 여러 글자를 배분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문자전송을 하려면 땀을 뻘뻘 흘려야 한다. 초고속 정보화시대에는 치명적이다. 최근 로마자 문명권도 이렇게 문자공포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 복잡한 표의문자를 쓰는 중국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중국에 휴대전화만 수출할 것이 아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한글 알파벳을 가르쳐야 한다. 한류 열풍을 탄다면 처음에는 재미로 배우겠지만, 점차 한글 알파벳의 마력에 빠져들 것이다. 황당한 기획이 아니다. 베트남에서 벌써 일어났던 일이다.

150년 전에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해 썼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베트남 전체가 로마자화됐다. 로마자가 고유문자보다 훨씬 편리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지금 로마자를 쓰고 있다.

현재 우리는 170여 나라에 선교사를 1만2000명이나 파견하고 있다. 그들을 통해 소수언어 종족들에게 토착어를 표기할 수 있도록 한글 알파벳을 가르치면 어떨까.

나아가 사라져 가는 소수종족들의 언어문화를 한글로 채록해 유네스코에 보관해 두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그러면 머지않아 한글 알파벳이 세계언어의 발음기호로 채택될 것이고, 세계 언어문화에 끼친 공로가 인정되지 않겠는가.

최근 나라 살림이 어수선하다. 국론이 분열되고 민생이 불안하다. 이제는 지루한 부엌싸움을 그만두는 게 좋겠다. 지난 역사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세계문명의 요청을 소홀히 한다면, 후세대들에게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한글날을 맞아 두 눈을 크게 뜨고 새롭게 세계문명을 개척하자.

김주성 한국교원대 인문사회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