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얘기, 친구 얘기, 함께 설거지 … 식탁 앞은 또 하나의 학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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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민사고에 입학하는 정영일(가운데)군은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진로에 대한 대화를 자주 나눈다. [최명헌 기자]

자녀를 똑똑하게 키운다고 알려진 유대인들의 ‘밥상머리 교육’이 다시 화제다. 자녀의 건강한 식습관뿐 아니라 인성·학업에까지 효과적이라는 과학적 연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식사할 시간을 내는 것도, 잔소리로 끝나지 않는 자리로 만드는 것도 사실 쉽지 않다. ‘밥상머리 교육 예찬론’을 펴는 세 가정의 노하우를 들어봤다.

박정현 기자

공부대신 시사 이슈·평소 생활 얘기를

올해 민족사관학교에 입학하는 정영일(경기 정자중 3)군은 자신의 미래를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 설계한다. 민사고를 목표로 공부하고, 3년 후 유학 계획을 세운 것도 밥상머리에서다. 오명선(45·성남시 분당구)씨는 “아이가 공부하느라 바빠 따로 시간을 내 얘기하기가 힘들어 식사 시간을 대화의 장으로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밥을 먹지 않을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얘기를 끌어낼 수 있죠.”

함께 밥을 먹지 않아도 오씨는 정군의 식사 자리를 지켰다. 공부 얘기는 하지 않는다. 주로 시사 이슈나 사건·사고 등이 반찬거리가 된다. 최근 유학 결정을 한 터라 밥상의 화제는 ‘유학’이다. 오씨와 남편은 유학에 관한 정보를 구해 밥을 먹으며 얘기해 준다. “아이와 함께 목표를 정하니까 어떤 생각으로 공부하는지 짐작할 수 있어 믿음이 가요.”

정군이 읽어야 할 책이나 권장도서가 있으면 오씨가 먼저 읽고 추천하거나 중요 부분만 체크해 읽어 보도록 권하는 시간도 이때다. 아이들이 고전을 어려워해 함께 얘기하기도 한다. 세상 사는 법을 일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공부만 하다 보면 친구들에게 소홀해질 수 있다는 것이 오씨의 생각이다. 정군은 “예전에 엄마가 라이벌은 멀리 있고 친구들은 같이 갈 존재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데 요즘에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가족·이웃의 감사함 느끼도록

이현화(35·서울 도봉구)씨는 “가족과 단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가족애를 느끼는 자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워킹맘인 이씨는 주말이면 딸 강이령(서울 오현초 6)양에게 식사 준비나 설거지를 돕게 한다. 식사를 준비하고 치우는 과정에서 수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고마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식당을 운영 중인 이씨 부부에게는 밥상머리 교육이 더 소중하다. 이씨는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 없는데 음식을 같이 하면서 저절로 요리놀이가 된다”고 말했다.

식사 전후에는 “잘 먹겠습니다”와 “맛있게 먹었습니다”는 감사의 인사를 하게 했다. 이씨는 “처음에는 식사를 준비한 부모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려고 시작했는데, 차츰 음식의 소중함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감사 인사에서 환경이나 농부들의 얘기, 부모의 일하는 얘기를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강양도 학교 급식 시간에 있었던 소소한 일까지 꺼내 놓는다.

식사 준비를 가족이 함께 했다면 1시간 정도 가족 시간을 만드는 것도 좋다. 이씨네는 아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집 근처 놀이터로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이씨는 “식사 시간에 못 다한 얘기를 나누다 보면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식사예절 가르치며 어른 공경 배워

최명희(33·인천 계양구)씨는 아들 김도일(7)군이 5살 때 친척들과 외식을 나갔다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아이가 밥이 먹기 싫다며 식당을 돌아다니고 젓가락을 이리저리 휘둘러 식탁을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은 것. 최씨는 안 되겠다 싶어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당장 밥상머리 교육을 시작했다. “수학이나 한글을 가르치는 것보다 식탁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죠.”

어른이 수저를 들기 전에 먼저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 밥은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 소리 내 씹지 않기, 어른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기 전까지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을 일러줬다. 식사 시간 전에 반드시 TV를 끄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로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니까 잔소리가 되더라고요. 놀이로 연결해 아이가 즐길 수 있도록 했어요.”

자기 자리에서 끝까지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 방석을 준비했다. 젓가락으로 콩 옮기는 게임, 어른 순으로 숟가락 들며 숫자 말하기 등을 해 재미를 줬다. 어른들이 있는 친척집을 방문해 꾸준히 연습했다. “식사예절을 가르치다 보니 어른 공경하는 것도 알게 됐다”고 최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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