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눈 덮힌 실크로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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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에는 중국 대륙 동서로 유달리 눈이 많이 내렸다. 특히 TV에 비친 눈 덮힌 신장(新疆)의 옛 실크로드는 더욱 광활해 보였다. 중계무역으로 富를 가져다 주는 실크로드는 여러 민족의 각축장이었다.
실크로드(絲綢之路)의 중심 도시 甘肅省 敦煌은 이름 그대로 富의 도시였다. 크다는 뜻의 敦과 풍성하다는 의미의 煌이 모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같은 의미로 한 때 敦德이라고도 불린 적도 있다. 敦煌에 외적이 침입해 오면 富商들은 자신들의 개인소유 석굴암자가 있는 莫高窟에 문헌등 보물을 감추어 두고는 떠나갔다. 수백년간 잊혀지고 있다가 근세기 외국인의 탐험대에 의해 조금씩 발견되었다. 신라의 구법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도 이곳이다.
敦煌의 북서쪽 100km지점에 玉門關이 있었다. 실크로드가 형성되기 전에는 “제이드 로드”(玉石之路)가 있어 신장의 옥석이 이 곳을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 갔다. 옥문관을 나가면 바다같은 초원과 사막이 나온다. 이곳은 한 때 匈奴의 땅이었다.
춘추 전국시대부터 중국의 중원을 위협하는 민족은 흉노였다. 진시황의 만리장성도 흉노의 침입를 막기위해 쌓은 것이다. 漢高祖 劉邦은 흉노의 포로가 되어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나기도 하였다. 흉노는 문자가 없어 기록이 남아 있지 아니하지만 중앙아시아를 동서로 묶어 초원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바다에는 배가 필요하듯 초원에는 말이 필요했다. 흉노에게는 빠른 말이 있었고 그들은 말을 잘 탔다. 농경민족에게는 안장도 없이 말을 잘타는 흉노의 기동성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말은 신병기와 같았다. 취약한 漢이 흉노제국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흉노의 말보다 더 빠른 汗血馬를 손에 넣은 武帝때부터 였다. 무제에게는 모험가 외교관 張騫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漢의 수도 장안에 잡혀 온 흉노의 포로의 이야기가 무제 귀에 들어갔다. 흉노와 月氏가 크게 싸워 두 나라가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무제는 大月氏국과 동맹한다면 흉노를 東西에서 협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하였다. 무제는 동맹교섭을 위해 張騫을 파견하였다.
장건은 장안을 떠난지 13년만에 무제앞에 나타났다. 100여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갔으나 돌아 왔을 때는 단 2명만이었다. 동맹교섭은 실패였다. 그는 玉門關을 나서자 말자 흉노에 잡혀 있다가 10년 만에 탈출한다. 그가 어렵게 서쪽의 大月氏국을 찾아 갔을 때는 이미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大月氏국의 왕은 더 이상 흉노와 싸울 전의를 잃고 있었다. 그러나 장건이 13년간 서역에 듣고 체험한 정보는 무제의 장군들이 흉노제국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하였다. 특히 하루에 천리를 달리며 피같은 땀을 흘린다는 무적의 신병기 汗血馬의 존재를 알아 낸 것이다. 한무제에게 실크로드를 잃은 흉노는 투항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소수민족의 왕조를 세우기도 하였다가 걸안, 여진, 몽고등 새로이 일어난 기마민족에게 흡수 동화되고 말았다.
한반도를 처음 통일한 신라의 김씨 왕족은 당시 무제에게 투항한 김일제(金日磾)라는 흉노왕족의 후예라는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金이라는 중국식 姓은 흉노가 黃金像으로 하늘에 제를 지낸다하여 무제가 특별히 하사한 것이라고 전한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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