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 마진 줄어 수익 악화 … 석유화학 호황 덕에 버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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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울 수도 없고…. 실적 발표철을 맞은 정유사들이 고민에 빠졌다. 석유화학사업에선 지난해 역대 최고 수준의 영업이익이 기대되는데 주력인 정유사업은 성적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주요 정유사 가운데 가장 먼저 개략적인 지난해 실적을 발표한 SK에너지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9014억원으로 한 해 전(1조8915억원)의 절반 밑으로 뚝 떨어졌다. 매출(35조8181억원)과 당기순이익(6904억원)도 각각 22% 줄었다. 하지만 전체 매출의 20~30%를 차지하는 석유화학사업에선 역대 최고 수준인 6000억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올린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구체적인 사업별 실적은 26일 발표된다.

실적 악화의 주범은 매출의 60~70%를 담당하는 정유사업이다. 휘발유·등유·경유 등 석유제품 값에서 원유 가격과 정제 비용을 뺀 정제 마진이 악화됐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국내 정유사들이 기준으로 삼는 싱가포르 단순 정제마진은 지난해 1월 배럴당 0.58달러에서 11월엔 -4.57달러까지 떨어졌다. 12월에도 -3.24달러였다. 국내 정유사들은 단순 정제(1차 정제)를 마친 뒤 고도화 설비를 이용해 다시 2차 정제를 하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손해를 보진 않는다. 하지만 지난해 사정이 나빴던 것만은 분명하다.

정제마진 악화의 가장 큰 원인은 세계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감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인도 등 신흥국들이 정유 설비를 많이 늘렸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에 따르면 지난해 새로 가동한 설비는 하루 100만 배럴 분이 훨씬 넘는다. 반면 노후화 등으로 폐쇄한 것은 하루 20만 배럴분에 불과하다. 수요는 주는데 공급은 늘어나니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SK에너지는 지난해 1분기 82%였던 가동률을 3분기 69%까지 낮췄다.

아직 지난해 연간 실적을 내놓지 않은 다른 정유사도 사정은 비슷하다. GS칼텍스는 지난해 3분기까지 전년 동기의 절반 수준인 5217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석유화학사업은 영업이익(5978억원)이 전년 동기의 2.6배에 달했지만 정유·윤활유 등 석유사업에선 761억원의 손해를 봤다. S-Oil도 정유사업 악화로 3분기까지의 영업이익이 확 줄었다.

지난해 석유화학 경기가 좋았던 것은 중국 덕이 컸다. 중국이 경기 부양에 나서면서 합성수지 등의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올해다. 중국 정부가 과열을 우려해 출구전략을 시행하면 경기 둔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의 설비 증설도 변수다. 정유는 경기가 나아져 지난해보다는 좋을 거란 전망이 많 지만 급격한 개선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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