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저승사자’로 돌아온 오바마의 보이지 않는 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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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금융산업 규제 방안 기자회견장.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바로 뒤에 폴 볼커(83·사진)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섰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규제안은 내 뒤에 선 이 키 큰 사람의 이름을 따 볼커 법이라 부를 것”이라며 볼커 전 의장을 치켜세웠다.

오바마에게 볼커는 언제나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볼커는 지미 카터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1979~87)에 FRB 의장을 맡았다. 그는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연 20%에 달하는 초유의 고금리 정책을 썼다.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이란 부작용을 낳았지만, 이 긴축 정책으로 물가 하나는 확실히 잡았다. 81년 14%에 달하던 물가상승률은 2년 뒤 3%대로 떨어졌다. 이로써 그는 ‘인플레 파이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은퇴한 그는 낚시를 즐기며 강연을 하는 소박한 삶을 살았다. 베개에 ‘일이란 낚시를 모르는 사람을 위한 것’이란 문구를 새겨둘 정도였다. 2007년 6월 워싱턴의 한 레스토랑에서 오바마를 만나면서 인생의 2막이 시작됐다. 오바마의 신선한 리더십에 감화된 그는 이듬해 1월 대선 경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했다.

이후 볼커는 오바마의 경제 가정교사가 됐다. 그는 경제에 대한 오바마의 질문에 빨리 답하기 위해 쓰지 않던 휴대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경제위기가 확산되면서 그의 입지는 더 강화됐다. 오바마 캠프에서 “오바마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볼커의 생각”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일찌감치 초대 재무부 장관에 거론됐지만 오바마는 그에게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회(ERAB) 위원장을 맡겼다. 금융위기 대처를 진두지휘할 총감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커는 화려하게 백악관으로 돌아온 뒤 곧 찬밥 신세가 됐다. 오바마에겐 사무국장을 통해 일주일에 3~4차례 대통령에게 메모 형식으로 의견을 전달할 정도였다. 금융개혁을 추진하라고 요구하는 볼커와 당장 급한 불을 끄고 싶어하는 오바마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볼커는 2008년 정부가 AIG 등에 구제금융을 지원할 때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정부의 정책이 은행의 대마불사를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글래스 스티걸 법의 재도입도 꾸준히 제안했다.

그의 소신 발언은 뒤늦게 먹혔다. 월가와의 전쟁을 선포한 오바마가 금융 개혁을 위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22일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경제 분야에서 볼커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인플레 파이터였던 그가 이번에는 ‘뱅크 파이터’가 될 수 있을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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