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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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3. 미국 미네소타의대 연수

세계 최초로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해 외국언론에 대서특필되고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며 학술원 회장이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렸을 때 매우 공부를 잘 했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함경남도 신흥의 초등학교 시절 공부보다는 제기차기를 좋아하는 개구장이 소년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아버지께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20분동안 계속 할 수 있는 제기차기 실력은 전교 1등이었다.

중학교 땐 학교를 대표해 육상선수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당시 학교성적은 그리 신통치 않아 전교 5~6위 정도가 아니었는가 싶다.

의대에 진학한 것도 시골 한의사의 딸이었던 모친의 권유 때문이었다. 6.25 전쟁 통에 부모님과 헤어지는 생이별을 한 나야말로 한평생 이산가족의 한을 안고 살아온 셈이다.

나는 1986년 세계보건기구 자문관 자격으로 중국의 베이징을 방문한 자리에서 북에 두고 온 누이와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부모님 모두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어야했다. 당시 국내 최고인 서울대의대에서 조교로 일하던 내가 우물안 개구리임을 자각한 것은 미국이란 신세계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당시만 해도 미생물학이라고 해봐야 결핵균 등 간단한 세균에 대해 서너 종류의 염색을 하고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 의대생들이 실습하는 미생물의 배양과 동정분리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물밀듯 밀려 들어온 미국의 신학문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조교시절에도 틈틈이 회현동 보건연구원에서 미국인으로부터 예방의학을 공부했으며 55년 1월엔 대방동 지금의 공군기지에 있던 121미군병원에서 미국인 소령에게 장내세균의 배양과 진단을 배웠다.

그러던 나에게 기회가 왔다. 미국무성이 전쟁으로 폐허에 빠진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서울대의대 교수와 조교들을 미국 미네소타의대로 연수보내는 프로그램을 55년 처음 시행했기 때문이다.

첫 대상자로 미생물학교실에서 내가 선발됐다. 나 이외에 해부학 김재남, 생리학 이상돈, 약리학 임정규, 생화학 장금용, 병리학 이상국 등 기초의학 6명과 진단방사선과 김주완, 신경외과 심보성, 마취과 이동식 등 임상의학 분야에서 3명의 조교가 1차 선발대로 선정됐다.

이들 중 일부 타계한 분도 있지만 대부분 오늘날 국내 의학계의 기틀을 세운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들 조교 외에 이비인후과 백만기, 소아과 홍창의, 내과 한심석, 생리학 남기영, 외과 진병호 등 기라성같은 서울대의대 교수들도 우리 조교 일행과 같이 미네소타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지금이야 미국여행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선 대단히 자랑스런 일이었다.

55년 9월15일 외무부로부터 여권을 받고 허허벌판인 여의도 군용비행장에서 프로펠러가 달린 미국 노스웨스트사 항공기에 탑승할 때의 설레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설레임도 잠시 이내 서투른 영어로 실수가 잇따라 터져 나왔다.

미국 출국전 두 달이나 영어공부를 했지만 지금처럼 회화공부 코스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영어사전 하나 지참한 것이 전부였다. 기내에서 금발의 스튜어디스가 식사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미투(Me too) 일색이었다. 결과는 제일 앞 자리에 앉은 사람과 동일한 '버터를 바른 느끼한 빵' 이었다.

메뉴를 바꾸고 싶었지만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고 서비스로 제공하는 커피나 와인도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명색이 서울대의대 교수요, 조교였지만 영어실력은 젬병이었던 것이었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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