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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정치의 맨얼굴을 봤던 정몽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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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980년대 중반이었다. 정 회장이 고려대를 찾았다. 당시 대기업 회장이 대학에서 행사를 갖고 연설하기란 수월하지 않았다. 권력과 기업에 대한 학생들의 거부감 때문이었다. 고대생들도 정 회장이 달가울 리 없었다. 강당 주변에는 ‘매판자본 물러가라’란 구호가 나붙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나는 열아홉 살 때 또 고향을 떠나 세 끼 밥을 먹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인천에서 부두 하역 일을 하다 서울로 올라왔지요. 마침 당시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공사가 있었어요. 거기서 내가 돌을 져 날랐습니다. 이고 지고 하면서 석재를 다지고 올렸습니다. 고대에서 ‘노가다’를 한 거지요. 그런 학교에서 연설을 하게 돼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 말에 분위기가 변했다. 대기업 회장이란 거부감은 오간 데 없었고 학생들은 정 회장의 연설에 녹아 들었다. 정 회장에게는 민심을 파고드는 힘이 있었다.

정 대표는 어떤가. 그는 나이스한 사람이다. 국제화 감각도 탁월하고 합리적이다. 당 대표를 맡은 뒤론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가진 그걸 아직 못 보여줬다. 민심을 후벼 파는 힘 말이다.

최근 정 대표의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여당 대표다. 정치적으론 대통령 다음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당 대표가 된 이후 친이(親李·친이명박)계 실세인 안상수 원내대표의 견제를 받았다. 서열상 아래인 장광근 사무총장이 그를 치받았다. 그 때문에 스타일을 구기기도 했다. 장 총장을 경질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직 그 일은 진행형이다. 당 일각에선 ‘대표가 총장 하나 못 바꾸느냐’는 말을 들었다.

박근혜 전 대표도 세종시 문제를 놓고 정 대표에게 날을 세웠다. 박 전 대표와는 세종시 신안의 당론 추진을 놓고 팽팽한 대결을 펼치고 있다.

정 대표는 이 국면을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할 거다. 장 총장을 경질해 당 대표의 위상을 세울 것인지, 박 전 대표와 일전을 확대할 것인지. 하지만 정 대표에게 그게 다가 아니다. 당직 개편은 성공해도 본전이다. ‘고용 사장’인 그가 ‘대주주’ 박 전 대표와 대결해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린다면 그의 위상이 올라갈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정 대표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주변에서 그를 ‘승계 대표’라며 낮춰 보려 했던 분위기가 왜 있었는지를 느끼는 거다. 정 대표가 단지 대표직을 승계했다고 낮춰 본 게 아니다. 민심이 정 대표에게 쏠려있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만만하게 본 거다. 권력을 가지려면 민심을 휘어잡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정 대표는 2002년 노무현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 철회 후 “현실 정치의 맨얼굴을 봤다”고 했다. 대권을 바라보는 그라면 그때 가진 각오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뚝심 유전자’가 그에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신용호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