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적당한 추락'의 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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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모닝 애프터' '(morning after)'라는 단어로 글머리를 열어보자. 그것은 '숙취' 라는 뜻으로 '행오버' '(hangover)'와 동의어다. 그러면서 '과거 잘못이 마음에 사무치는 시기' 라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지난 여름, 인터넷 미디어 '이슈투데이' 에 이 제목의 글이 올라 잠시 화제를 뿌렸다. 필자인 모닝스타코리아 정병선 대표는 무너진 주식시장 앞에 넋을 잃고 있는 한 증권 맨을 향해 이렇게 썼다.

"밤새워 통음(痛飮)하며 환락에 젖었던 짜릿한 광란의 시간은 지나가버렸다. 동쪽 창에 여명이 스밀 때 조용히, 그러나 어김없이 찾아드는 극심한 두통과 격렬한 구토를 수반하는 '모닝 애프터' 에 우리는 처절하게 시달리고... "

그는 끝내 그것을 '자학(自虐)의 순간' 이라고 했다. 정말 자학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그토록 오만할 수 있었을까. 길거리로 쏟아진 노숙자들과 아픔을 함께 하고자 허리띠를 졸라맬 각오를 다졌던 건 불과 3년 전. 우리는 반칙으로 돌아온 반환점을 향해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 길에서의 반성론 또한 각별했다.

하지만 좌절감은 여전히 깊다. '지금부터 진짜 IMF' 라는 식이다. IMF-. 국제통화기금의 영문 이니셜이건만 우리에겐 '위기' 의 대명사로 둔갑해 있다.

정확히는 '외환위기' 고 'IMF 구제금융 체제로의 편입' 인데 그냥 IMF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그 단어로 긴장감을 새롭게 다진다는 점이다.

하긴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질주하던 나라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벼랑에 섰으니 오죽할까.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는 "밑바닥까지 추락한 것에만 날개가 다시 돋는다" ( '닷컴 쇼크' 중에서)고 충고했다.

규제완화와 구조조정의 다급함도 같이 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비난하며 '적당한 추락 후 회복' 과 '구조조정' 의 두마리 토끼를 좇기 바빴다.

묘하게 위장된 덫이었다. '철저한 변화(deep change)' 냐, 아니면 '더딘 죽음(slow death)' 이냐의 갈림길이었건만 우린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달궈진 솥에 던져진 개구리는 뛰쳐나와 살지만 서서히 데워지고 있는 물에 넣은 개구리는 결국 삶겨 죽고 만다 했는 데도 말이다.

되돌아가야 할 점을 저만치 앞두고 우리는 돌아서서 축배를 들었다. 죄의식을 덮을 요량이었는지 엉뚱한 발상에만 집착했다.

금융.기업 구조조정의 시한을 못박은 것이 대표적이었다. 그나마도 당초는 올해 말이었는데 갑자기 내년 2월이랬다가 다시 올해 말로 오락가락했다.

월별 점검체계 운운하는 말에선 실소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구조조정에 끝이 있는 건가. 왜 우리는 '아름다운 목표미달' 을 용인하지 않는 건가.

새로운 연호(年號)를 만들자는 흥미로운 발상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아다시피 예수의 탄생을 기준으로 BC(기원 전).AD(기원 후)가 나뉜다.

네티즌들은 이를 패러디해 BG(비포 게이츠).AG(애프터 게이츠)라고들 한다. 빌 게이츠의 윈도 1.0 발표시점(1985년)이 기준이다.

그리고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분단' '주체' 연호들...

BI(비포 IMF).AI(애프터 IMF)라고 하면 어떨까. 1997년을 AI 원년으로 삼는다면 지금은 AI 3년. BI 시절의 낡은 사회 통념일랑 마지막 모닝 애프터의 구토로 쏟아버려야 할 일이다. 갈 길은 먼데 벌써 어둠이 몰린다.

허의도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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