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16) 1·4후퇴 피란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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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초 중공군의 공세로 아군이 한강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게 되자 미군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비행기에 태워 남쪽으로 보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1·4 후퇴 당시 한 어린아이가 미 공군 수송기에 오르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한강에 다리가 놓였다. 고무보트 위에 판자를 얹어 만든 임시 부교(浮橋·뜬다리)였다. 6·25 개전 초기에 한강 인도교를 끊음으로써 수많은 사람을 적 치하(治下)에 그대로 남게 했던 그런 실수는 다행히 반복되지 않았다. 미 제1 기병사단의 포병사령관 찰리 파머 준장이 마포에 이 부교를 만들었다. 미 1기병사단의 공병이 그 작업을 했다. 파머 준장은 그 다리를 감독하는 지휘관이었다.

부교는 두 개였다.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 치하에서 고생했던 사람들이 등과 머리에 짐을 잔뜩 이고 지고 강을 건넜다. 전쟁 발발 직후 인도교를 폭파할 때 빚어졌던 혼잡은 없었다.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가는 민간인의 행렬, 사병과 무기를 실은 군용 트럭들이 줄을 이어 건너면서 두 줄로 난 다리는 붐볐지만 그나마 질서가 유지됐다. 내가 탄 지프도 그들과 함께 강을 건넜다. 목적지는 안양이었다.

1951년 1월 2일 안양의 한 방직공장에 국군 1사단 이동 지휘소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사단의 주 병력은 한강 남쪽, 지금의 동작동 국립묘지와 중앙대가 있는 흑석동 사이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그곳에 전투 부대를 배치한 후 나는 안양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내가 탄 지프는 어느덧 피란민이 하염없이 걷고 있는 길을 지나고 있었다. 피란 행렬이야 전쟁 발발 이후 늘 보아 오던 것이었지만 왠지 느낌이 달랐다. 차는 사람 틈에 끼여 있어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차 옆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말이 아니었다. 영하 15도의 추운 날씨에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데리고 피란길에 나선 한 가족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지나가는 지프를 그저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에 지프에 탄 내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인도교가 폭파됐을 때에 비해 피란민들이 더 안전하게 강을 건넜다는 점이 위안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허무하게 또 우리의 수도를 적의 수중에 넘겨준 것이다. 그들은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엄동설한에 다시 집을 나선 것이다.

나는 그날, 한강을 걸어서 남하하는 수십만의 시민을 바라보며 무거운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도 나는 조선 때 만들어진 길이 17㎞의 서울 성곽이 지닌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 그 성곽을 쌓기 위해 많은 사람이 동원됐을 것이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성곽을 쌓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조는 수도를 지킨 적이 없었다. 왜군이 쳐들어 왔던 임진왜란 때 조선 왕조는 수도를 지키면서 결사(決死)의 항전 의지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북쪽으로부터 여진족의 청(淸)이 쳐들어 왔을 때 임금은 신하와 함께 백성과 수도를 지키겠다는 결연한 싸움의 의지를 내비치지 않았다.

내 지식 속의 조선 왕조는 적이나 반란군이 서울에 들이닥칠 경우 늘 도망치기에 바빴고, 적의 수중에 수많은 백성의 삶을 그대로 버려두고 제 목숨과 재산만을 보전하기에 급급했다. 이 피란민의 행렬에서 나를 바라보는 저 어린아이들의 눈에 나 또한 도망치는 왕조의 한 군인으로만 비쳤을지도 모른다. 6·25가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영용(英勇)한 국군이 적들을 물리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방송국 녹음 테이프에 걸어 놓은 뒤 먼저 남행길에 나섰다.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는 한강 인도교도 차분하게 앞뒤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섣불리 폭파했다.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다 어느새 밀리기 시작한 전선이다. 국군과 연합군은 한강에 임시로 만들어진 부교를 통해 다시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기에 바빴다. 안양의 사단 이동 지휘소로 향하는 차 속에서 내 마음은 줄곧 무겁기만 했다.

준비가 없는 나라의 운명은 뻔하다. 비상시를 예견하고 위험을 미리 대비한 정부와 그러지 못한 정부는 다르다. 조선왕조와 대한민국은 그런 점에서 닮았다. 위기를 상정하고 그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정부다.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불과 2년이 지나지 않아 침략을 당하는 바람에 미처 대비할 여유가 없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볼 때 그것은 핑계다. 좀 더 침착했더라면 북한의 남침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위험에 대비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더 밀려야 할까. 나는 적을 물리치고 다시 수도를 탈환할 수 있을까. 답답하기만 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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