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⑮ 밀리고 밀리는 전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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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과 미군, 연합군을 한강 이남까지 밀어낸 중공군의 3차 공세는 1950년 12월 하순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사진은 임진강 부근까지 내려온 중공군 포병들이 12월 31일 국군 등이 포진한 남쪽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전쟁에서 적에게 한 번 등을 보이면 이를 되돌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거센 물결에 떼밀려 하염없이 떠내려 가야만 한다. ‘크리스마스 공세’로 소강상태에 있다가 섣불리 중공군을 밀어붙이려 했던 게 아무래도 탈이었다. 힘겹게 들어섰던 평양을 다시 적의 수중에 내주고 밀리기 시작한 지 2주쯤 지났을까. 정신없이 내려오다 보니,내가 그해 6월 25일 적을 처음 맞았던 임진강이 다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개전 당시 내가 맡았던 지역이다. 그 산과 강이 내게는 너무 친숙했다. 준비 없이 맞았던 북한군의 침공이 떠올랐다. 전의(戰意)가 다시 불타올랐다.

그러나 우리 1사단에는 하늘이 내려준 시간, 천시(天時)가 맞지 않았다. 그해 겨울이 유난히도 추웠던 탓에 임진강 강물은 이미 희고 딱딱한 얼음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병사들을 동원해 두드려 봤다. “쾅-쾅-” 소리만 날 뿐 사람의 힘으로 깨뜨리기에 역부족이었다. 물이 얼어붙은 강은 적에게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다. 저 북방으로부터 밀려오는 중공군의 공세는 이 꽁꽁 얼어붙은 강을 쉽게 건널 게 뻔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바닥도 참호를 파는 데 큰 장애였다. 강물도 얼어붙고, 땅바닥도 굳게 얼어붙은 임진강 전선은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1950년이 저물던 12월 31일 늦은 오후에 중공군은 공세를 다시 시작했다. 마침 그날 낮에 당시 한국은행 이사였던 장기영(작고, 한국일보 창업자)씨와 재무차관이었던 송인상(95·현 효성그룹 고문)씨가 연말연시 일선장병 위문차 찾아 왔다. “은행원들이 국군을 위로하기 위해 직접 김치를 담갔다”면서 커다란 김치 항아리 두 독을 싣고 왔다. 심신이 지친 장병에게 이런 선물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예하부대에까지 김치를 돌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즐거움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내려앉는 어둠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특유의 피리와 꽹과리 소리가 난 뒤에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이 시작됐고, 이어 적들이 나타났다. 엄청난 수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군이 들이닥치면서 전면에 있던 12연대가 뚫리기 시작했다. 동료의 시체를 넘고 넘어 물밀 듯이 전진하는, 전형적인 중공군식 인해전술이었다.

우리 1사단과 인접 국군 6사단 사이의 경계인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이 먼저 밀렸다. 우리 쪽에서는 12연대가 나가 있던 곳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15연대를 예비진지에 투입한 뒤 전황을 파악하기에 급급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앞에 나가 있던 부대와는 통신도 끊겼다. 11연대는 그대로 버티고 있었으나 12연대와 15연대는 걷잡을 수 없이 밀리고 있었다.

중공군의 돌파를 저지하기 위해 나는 공병대와 통신대 병력까지 투입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선전(善戰)과 평양 1호 입성 등 1사단이 쌓았던 전공이 신기루처럼 여겨졌다. 역전의 1사단도 무너지다니….

참모들과 미군 고문관들에게 모두 후방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나와 주요 참모 몇 사람만 파주군 법원리 근처 초등학교에 있던 사단 지휘소에 남아 후퇴 상황을 점검했다. 그때 나는 엄청난 좌절감과 허탈감에 빠져 기력을 거의 상실했다. 내 막사를 드나들며 전선과의 교신을 시도하던 통신참모 윤혁표 중령은 훗날 당시의 나를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고 표현했다. “전화기를 손에 쥐여주면 통화를 한 뒤 제자리에 놓지 못하고 떨어뜨릴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또 내가 무전기를 내려놓은 뒤 방금 했던 말을 계속 반복했다고 한다. 혼잣말로 중얼중얼거리는 모양이 마치 실성한 사람 같았다고 했다. 나는 아무런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으로 ‘휭-’ 하는 소리만 스쳐갔던 기억이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그만 정신을 놔버리자 그런 상태에 빠져든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캄캄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말라리아에 시달리던 내가 오한에 몸을 떨고 있을 때 늘 버너를 갖고 와 커피를 끓여 주던 작전처 미 고문관 메이 중위였다. 젊은 나이에 비해 머리카락이 희고 키가 컸던 그는 나를 지프로 옮기면서 “사단장님, 전쟁을 하다 보면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부끄럽지만 물러나야 할 때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전쟁에서는 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지프에 태워진 나는 남으로 달려 한강변에 도달했다. 그러나 울컥하면서 다시 솟구쳐 오르는 분함이 있었다. 이대로 서울을 다시 내줘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눈앞에 닥친 엄연한 현실이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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