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왜곡으로 꽉 찬 학벌·학력 공화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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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학벌.학력 공화국' 한국 사회의 실상에 관한 가장 리얼한 이야기 한토막을 공개하려 합니다.

'리얼한 이야기' 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짐짓 골랐지만, 속마음은 다릅니다. 사안의 성격이 끔직하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꼭 1년전 산문집 '오늘은 다르게' (해냄)를 통해 이 얘기의 일부를 밝혔던 당사자인 시인 박노해는 아예 '전율스럽고, 몸서리친다' 고 말하더군요.

상황은 박노해가 1991년 사노맹 사건으로 취조받던 안기부 지하실에서 벌어졌습니다. 고문으로 몸은 망가져 갔고, "대학도 못나온 공돌이 주제에 어떻게 '노동의 새벽' 같은 시를 썼느냐" 는 수사관들의 닥달에 박노해는 몸과 마음이 모두 만신창이가 됐다고 합니다.

취조 막바지, 척 보니 거물급으로 보이는 수사총책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인간이 얼마만큼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문제의 발언을 당시 그 사람이 던집니다.

"무식한 노동자가 일류대 출신들을 조직원으로 거느린다는 게 말이 되느냐? 솔직히 자존심이 상한다. 사람은 출신 성분을 못 속이는 법이다. 비록 적이라도 카이자르는 상대할 수 있어도, 스파르타쿠스(로마 시대 노예반란 주동자)는 상대할 수 없다. " (1백59쪽)

느낌이 어떠신지요. 나동그라진 박노해가 이미 사회적으로 죽은 목숨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에 그 '엘리트 아닌 엘리트' 는 자신의 일그러진 속마음을 드러낸 겁니다. 책에서 박노해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보수 진보니 하는 고상한 이념의 영역과 달리 학벌.성별을 구별짓는 숨은 구별짓기의 칼날 앞에 날개꺽인 민초들의 설움이 내 안에서 사무친다. " 기자는 당시 엄청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두겁을 쓴 인간에 대해 갖는 최소한의 신뢰감이 무너지는 느낌같은 것이죠. 학벌.학력 공화국이 사람을 얼마만큼 왜곡시키는가의 실체를 본것입니다.

마침 그 무렵 박노해를 만나 책에는 이름이 노출되지 않은 수사총책이 누구였냐고 물었습니다. 짐작대로 그는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인물이라고 밝히더군요. 또 명문대 법대 출신인 그에겐 개인적 콤플렉스가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에게 학벌이란 콤플렉스를 가리우는 '장식' 이었을 겝니다. 한국의 엘리티즘과 학벌이란 것이 이토록 허구적이고 왜곡될 수 있다고 기자는 판단합니다.

1년전 기억은 신간 '탈 학교의 상상력' (삼인)을 읽으며 떠올린 것입니다. 서울 법대 출신의 이한(탈학교 실천연대 회원)이 쓴 이 책은 '학교란 우리 현대사의 실패를 상징한다' 는 문제의식 아래 학교에서의 성취(성적)과 사회적 성장(소득, 지위)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차근차근 증명하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의 학교붕괴, 교실붕괴 상황에서 강력 추천을 할 만합니다. 한가지, 이 글에서 일부 강도 높은 표현을 포함해 부분적으로 글쓴 기자의 '분노의 가시' 가 삐죽 솟아 있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라서 그랬습니다. 글이란 때론 속마음이 묻어나야 맛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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