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기초생활보장제 해부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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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민생활 기초보장제도가 시행전부터 몸살을 앓고있다.

정부는 금융기관 예금 조회나 ▶부동산 보유 현황 ▶납세 실적 등에 대한 조사를 통해 소득과 재산을 숨겨놓은 가짜 신청자들의 적발에 나섰지만 ▶이혼 ▶위장전입방법까지 동원한 양심불량자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빈곤층 선정 단계부터 국민 혈세가 새기 시작한 셈이다.

그런가하면 지원되는 생계비자체가 적지않아 어렵게 일하는 대신 적당히 돈을 타겠다는 도덕적해이현상도 나타나 우리수준에 너무 높은 생계비지원을 하지않느냐는 논란도 계속되고있다.

◇소득 낮춰 신고=서울 신림동의 목수 李모(43·4인가구)씨는 월 10일 노동에 40만원 소득이 전부라며 최저생계비를 신청했다.그러나 李씨에 일자리를 연결해주는 동네 모집책에게 확인한 결과 李씨의 소득 추정액은 월 1백20만원.

李씨는 “증거를 대라”며 우겨댄끝에 70만원으로 절충했다.李씨는 알토란 같은 공돈 23만원을 다음달 20일부터 매달 받게된다.

소득자료가 없는 일용직이나 영세 자영업자·노점상일수록 소득 낮추기가 노골적이다.사회복지사의 현장조사는 ‘소득 흥정’으로 변질되기 일쑤다.

서울 동대문구 金모 사회복지사는 “하루 2,3만원 벌이가 너끈한데도 1만원도 안된다고 우기는 노점상들에겐 1만9천원(공공근로 1일수당액)을 수입으로 잡자고 하면 대충 절충이 된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金모 사회복지사는 “신청자들은 실제 소득의 60∼70%만 신고하고 있으며,조사를 통해 90%까지 끌어올리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50대 후반의 高모(경기 의정부)씨는 지난 7월 중소기업 경리로 일하는 맏딸(24)의 주민등록을 친구 집으로 옮겨 생이별 대열에 끼었다.막노동을 하는 高씨와 파출부인 부인 소득이 60만원인데 딸 월급 70만원까지 합치면 빈곤층 기준을 넘기 때문이다.

◇‘도덕적 해이’징조=마음만 먹으면 ‘빈곤층’을 벗어날수 있는데도 가만히 앉아 최저생계비를 신청한 이들도 많다.일단 빈곤층으로 선정만 되면 매달 1백만원 가까운 돈(4인가구 평균 93만원)을 그냥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洪모(36·경기도 광명시)씨는 월 1백20만원 수입이 거뜬한 타일공이었지만 석달전 일을 그만두고 풍물패 강사를 한다.“하고싶은 일을 하겠다”는 것이 洪씨가 일을 그만둔 이유.

두 아들을 둔 4인가구에 洪씨 수입은 월 20만원.최저생계비와의 차액 70만원이상을 보조받을 수 있다. 洪씨는 1주일에 4일이상 일하고 있어 더이상 강제로 일을 시킬 수도 없다.

사회복지사 金모씨는 “가진 기술을 써먹지 않아도 생계비를 받을 수 있으니 누가 힘들게 일하겠느냐”며 “몸이 멀쩡한데도 동사무소만 쳐다보는 이들이 적지않다”고 안타까워했다.

◇재산 조사 한계=李모(47·수도권 신도시 거주)씨는 외환위기때 부인과 합의이혼하면서 서울 충무로의 1억원짜리 상가 등 모든 재산을 부인 명의로 바꿨다.

시가 1억8천만원짜리아파트도 부인명의로 돌리고 그 아파트에 시세를 턱없이 밑도는 4천만원에 임대계약을 맺어 살다가 그마저 “재산기준을 초과한다”는 얘기를 듣자 3천만원에 새로 임대계약을 꾸며 대상자가 됐다.

대전 외곽의 4평짜리 구멍가게 주인 金모(42)씨는 16평짜리 무허가 주택과 가게보증금 등 6천만원의 재산이 있는 경우.재산 초과로 빈곤층 요건이 안되지만 3천8백만원을 빌린 차용증서에 법무사 공증까지 붙여 대상자로 선정됐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렸다고 공증을 받아오면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워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부산에 사는 趙모(43)씨는 이달초 95년식 엘란트라 승용차를 팔았다.사회복지사 徐모씨는 “일부러 팔았다는 의심은 가지만 매매증명서가 있는만큼 대상자로 포함시켜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부실한 부양의무자 조사=지난 7월 대전 중구의 沈모 사회복지사는 대상자인 金모(71)할머니의 부양의무자인 아들(49)이 서월에 거주하자 부양능력 조사를 서울쪽 사회복지사에 의뢰했다.

하지만 ‘아들이 구멍가게를 해서 자기네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고 한다’는 것이두달만에 서울쪽 사회복지사에게 받은 통보의 전부다.이를 토대로 金할머니는 매달 32만원씩 최저생계비를 받게됐다.부양의무자 조사가 ‘시늉’에 그치고 있는 단면이다.

사회복지사가 방문 한번 못한채 전화로 불러주는 소득·재산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은 물론,연락이 안되거나 응답을 거부해 소득이나 재산 항목을 비워둔채 조사를 마치는 일이 다반사다.

일선 사회복지사들은 “아들,딸 등 부양의무자를 조사해야 할 일이 당사자 조사의 두세배나 된다”며 “당사자 조사도 허덕이는 상황에 부양의무자 조사는 전화에 의존할수 밖에 없고,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수 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기획취재팀=고현곤.이상렬.김현승.조민근.홍주연 기자

제보=02-751-5519, 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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