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⑬ 12월 맥아더의 철수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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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사단장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1950년 12월 5일 평양 동부 지역을 지나 남으로 후퇴하고 있다. 중공군 2차 공세에 밀린 국군 1사단은 사리원을 거쳐 임진강까지 퇴각했다. 곧이어 시작된 중공군 3차 공세로 이듬해 1월 4일 서울을 공산세력에 다시 내준 것이 ‘1·4 후퇴’다. [백선엽 장군 제공]

전황(戰況)이 다급해졌다. 1950년 12월 초, 국군 2군단이 무너지면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중공군의 기세가 막힘이 없었고, 그 서쪽을 방어하던 미 2사단이 큰 타격을 받고 넘어졌다. 청천강 방어선을 지키기 힘든 상황이 됐다. 이제 평양과 원산을 잇는 라인에 방어선을 새로 설치해야 했다.

도쿄에 있는 맥아더 총사령관이 서부 전선을 지휘했던 월턴 워커 8군 사령관과 10군단장으로 동부 전선의 공격을 이끌었던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을 소환했다. “평양과 원산을 잇는 선에 방어선 설치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때 연합군의 38선 이남 철수를 결정한다. 1950년 12월 3일의 일이다. 그해 6월 25일 거침없는 북한군의 공세에 쫓겨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기사회생해 38선을 넘은 뒤로부터 2개월여 만에 우리는 다시 그 남쪽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통한(痛恨)이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까. 먼저 그런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전장(戰場)이다. 감정을 내고 그것을 다시 억누르는 데 사용할 시간이 내게는 부족했다. 챙길 것을 먼저 챙겨야 한다. 정신을 다시 가다듬기로 했다. 후퇴하는 때의 상황은 내게 감정을 다독거려야 하는 사치스러운 여유를 주지 않는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아군의 다른 모든 부대가 청천강을 넘어 철수를 마칠 때까지 이들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내게 내렸다. 북진한 뒤 운산과 태천에서 후퇴를 하면서도 국군 1사단은 그대로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은 병력과 화력을 사용해 아군의 철수를 돕는 엄호부대(covering force)로서의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엄호부대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1사단도 남을 향해 퇴각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 해 10월 아군으로서는 최초로 입성한 평양을 지나야 했다. 마음속이 편할 리 없었다. 언제 이 평양에 다시 올 것인가라는 생각만 들었다. 12월 5일 해가 진 차가운 날씨 속에 동평양을 지날 무렵이었다.

평양의 하늘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평양 곳곳에 만들어졌던 미군 보급소에서 퇴각하면서 미처 가져가지 못한 막대한 양의 군수품과 유류(油類)가 불에 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화염으로 평양의 모습은 기괴했다. 불타는 물자 더미 사이로 사람들이 뛰어들고 있었다. 의복과 식품 등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라도 건져내기 위해서였다. 피란 대열에 섰던 사람들도 있었고 주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퇴각하던 부대원들도 하나둘씩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을 제지하는 경비병들의 사격 소리도 가끔 들렸지만 사람들을 다 막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요행히 물자 몇 개를 건진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불에 타는 막대한 물자를 보고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것이다. 무개화차에서 내려지지도 않은 신형 전차 10여 대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는 순간에는 나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합군은 12월 11일 임진강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1사단은 그들의 철수를 마지막까지 지켜줘야 하는 엄호부대의 역할을 다시 맡았다. 그들이 철수하는 도로와 그 주변을 면밀하게 지켜야 했다.

그때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미군이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난감했다. 북에서는 정확한 규모를 짐작할 수 없는 중공군이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적유령을 넘은 중공군이 거침없이 운산과 군우리, 청천강과 평양을 거쳐 남으로 내려가고 있는 와중에 미군의 철수라니.

말을 해준 사람은 미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었다. 개전 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함께 적을 막아냈던 절친한 사이였다. 철수 길에 1사단이 엄호부대를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사리원 남쪽에 있던 나를 찾아온 것이다. 반가운 인사를 마친 뒤 그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귀띔을 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 그를 다그쳤다. 그는 “우리는 군인이다. 소문에 구애받지 말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말만 했다. 철수한다는 것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았다. 그로서도 대답을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거침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을 앞에 둔 시점에 듣게 된 소문 치고는 너무 고약했다. 우리 사단이 6·25 개전 초기에 맡았던 임진강 지역으로 내려온 것은 12월 15일이다. 내게는 낯익은 곳이었지만 마음은 불안했다. 저 앞으로 넘어오는 중공군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미군은 철수하는가. 개전 이후 나를 쫓아다니던 말라리아가 재발했다. 피로가 겹치고 불안감으로 신경이 날카로울 때 늘 찾아오는 병이었다. 오한이 나면서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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